'OO사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다. 이전에도 공중파에 비숫한 포맷을 방영했던 적이 있다. 진짜든 가짜든,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잘 보지 않는다. 다만 왜 이런 예능이 인기를 끌까 궁금할 뿐이다. 군대라는 특수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부조리한 언행과 가학적 행태를 굳이 담밖으로 꺼집어내서 보여주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의무이거나 직업으로서의 군인도 아닌 알반인을 대상으로, 아무리 좋게봐도 육체적 단련이나 정신무장하고는 무관한 훈련과 에피소드가 주를 이룬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군대에서 새로운 걸 깨달았고 세상을 좀더 이해하고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의 가혹한 기합에도 도무지 외워지지 않던 수천개 군수품의 로트번호가 단번에 외워지는 기적을 경험했으며,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의 층위를 체감했다. 하룻밤새 외울 수 있었음에도 외워지지 않았던 건 '이 따위가 뭐람. 제대하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것인데...'라는 방호벽 때문이었다. 불현듯 '어차피 3년(정확히는 2년 7개월)은 보내야하는데 이까짓 것 외우지 뭐. 이게 뭐라고..' 그렇게 생각스위치를 ON시키자마자 그 많은 번호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박혔다. 같은 계급과 신분이라도 보직이나 배경에 따라 차등대우 받는 현실을 깨달았으며 아주 가끔씩은 노력과 무관하게 운이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도 있다는 알게됐다. 다행히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았던 편이다. 영창을 가야 했던 사고를 (한번은 고의가 아니었지만) 저지르고도 두 번의 군기교육대 행으로 끝났다.
아무튼 나로서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강건한 육체를 가졌었고 유연한 사고의 바탕이 됐던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낙천적 기질과 영악한 자기합리화가 한 몫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배낭여행을 떠나 이탈리아에 도착했던 날이었다. 숙소까지 꽤 걸어야 했었는데 아내의 배낭이 무거워 보였다. 아내의 배낭까지 호기롭게 앞으로 짊어졌다. 균형이 잘 잡혀 오히려 편하다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그날 밤 어디가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디스크 환자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경험했다. 다행히 오래가지는 않았다. 귀국해서 작심하고 헬스장에 등록했다. 근육은 날이 서고 계절성 알러지도 사라졌다. 그런데 아무리해도 재미가 붙지않았고 흥미는 날로 떨어졌다. 닭 가슴살에서 닭똥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술을 못마시니 고문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모임에서 누가 이런 말을 했다. "근육 자꾸 키우면 부작용도 많아. 오래 못산다니까.... 보디빌더들 수명이 일반인보다 짧다구" 정확한 통계나 과학적 근거는 필요없었다. 찾아보지도 않았다. 나로서는 좋은 핑계거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지금도 가끔 탄탄한 몸을 가진 친구가 운동을 권하면 이렇게 말한다. "난 오래 살고 싶어.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몸을 아껴쓸려구..."
처가의 둘째 동서 형님은 등산 매니아시다. 신접살림을 형님 택과 가까운 데 차렸기에 무시로 드나들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매주 빠짐없이 산행을 가시는 분이라 몇 번 따라나섰다. 나이차가 많은데 뒤쳐질 수 없어 이 악물고 곧잘 쫒아다녔더니 내가 산을 잘 타고 체력이 남다르다 여기셨던 모양이다. (형님은 3시간 코스를 절반에 주파하는 분이다) 그 즈음에 학교 동기들이 등산모임을 결성했다.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지만 산천경개를 유람하듯 거니는 산행은 아니었다. 그러다 그 모임에서 한라산 등정을 했다. 살얼음이 남아있는 초봄이었는데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서둘러 올랐다 내려왔다. 정상에 오르는 쾌감은 잠깐이었고 거칠게 몰아쉬던 숨소리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산도 좋아하고 캠핑도 취미인 나였지만 힘들어서 어려운 코스를 피한다는 건 어쩐지 내키지않았다. 내 자신에게 보다 그럴듯한 설득논리가 필요했었던 것 같다. 절친한 고교통창이 병원장이다. 진료과목은 정형외과다. 어느날 그 친구가 물었다. "야 너 등산 자주 하냐?" "가끔 하는 편이지" "그냥 평탄한 흙길이나 자주 다녀. 가파른 산은 피하고...특히 돌산은 오르지도 마라...." "왜?" "내가 무릎이나 다리에 이상이 있어 찾아오는 50~60대 환자에게 꼭 묻거든 "등산 자주 다니셨죠" 하고 그러면 대부분 그렇다고 해. 우리나이 때 등산 별로 안좋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과학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핑계거리가 또 있을까. 이후로 가파른 산이나 긴 시간을 요하는 등산은 하지 않는다.
군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으니 나름의 의미라도 찾았던 것이다. 지금 나는 굳이 그런 과정이 없이도 더 뛰어난 육체와 큰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들을 부지기수로 만나며 살고 있다. 그런데 굳이 상황을 연출하면서까지 (물론 출연자들은 다른 의도가 있겠지만) 우스꽝스러운 마초이즘이나 억지스러운 동료애 내지는 정신 무장을 강조하고 미화하는 것이 안쓰럽고 볼썽사납다.
그럴 바에는 나처럼 약삭빠른 정신승리나 하면서 자가용은 내버려두고 자전거나 걷는 데 취미를 붙이는 것이 훨씬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