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기 전에...

집안 내력

by 문성훈

아버지는 자식에게 살가운 분은 아니셨다.
당신은 5남5녀 10남매중 아홉번째로 태어나셨다. 형 둘이 더 있었는데 낳자마자 죽는 바람에 10남매가 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식을 많이 뒀다고 할머니가 상도 받으셨다는데 본 적은 없다. 가끔씩 그 시대가 백년 전처럼 멀게 느껴지게 하는 이야기다. 할머니는 사진으로만 뵈었을 뿐 어머니가 시집 오시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터울이 적어서인지 막내고모는 할머니가 되고서도 유난히 아버지를 따랐다. 아버지는 그런 여동생을 각별히 챙겼다. 막내고모는 학창시절 가방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 친구들이 늘 들어줬고 업고도 다녔다고 자랑스레 말씀하셨다.
기질도 주먹도 보통이 아니었다는 고모의 증언이 아니더라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기억들이 내게도 있다.

38년 생이니 범띠다. 눈썹이 짙은데가 몇 가닥 터럭이 뻗쳐있어 호랑이 수염같았다.
그 유산을 내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세수할 때마다 그 터럭을 곱게 옆으로 눕히는데 지금은 길이 잘 들었다.
당신 세대가 그러했듯 무척 곤궁한 살림이었던 모양이다. 오랫동안 부모까지 12명이 한 방에서 생활했었다고 들었다. 그 집을 큰아버지가 물려받았고 장손인 사촌형이 다시 2층 양옥집을 올려서 살았다.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옛집의 흔적은 지금은 없어진 마당 건너편에 있던 헛간이다. 흙벽에 창문 대신 동굴같은 구멍만 뚫려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명절이나 제사때 큰 집을 찾으면 밤에 막걸리 심부름을 가야 할 때가 많았다. 큰 집은 하필 긴 골목 안 막다른 데 있었다. 대나무밭에서 들리는 잎사귀 부비는 소리에다 가로등도 띄엄띄엄한 어두운 시골길을 지나야 했다. 오싹한 이 길을 오가야 했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난관은 그 헛간이었다. 골목으로 뚫려있는 창구멍으로 뭔가 보이기도 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헛간에서 아버지가 공부를 하셨다고 했다. 한겨울에도 멍석을 깔아놓고 공부하다 두 다리가 동상에 걸려 큰일날 뻔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큰아버지는 니 아버지가 독종이라면서 그 얘기를 해주셨고 고모는 다들 한 방에서 자는데 혼자 공부한다고 불을 안끄면 구박을 받아서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당신이 불콰해서 퇴근한 어느날.
내게 입학등수로 매겨졌다는 당신의 학번과 교원시험 수석 기록을 들먹이셨다. 아마 내가 고 2쯤이었는데 공부는 안중에 없는 아들이 걱정이 되셨던 것 같다. 그 기억말고는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궁핍한 살림에 노산이셨던 부모의 사랑보다는 많은 형제들 틈바구에서 생존경쟁하듯 성장하신 분이다. 대체로 투박하고 거칠었으며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셨다.

할아버지에 관한 내 기억은 당신의 바람이 새는듯한 잦은 기침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는 정도다.
그때가 너댓살 무렵인데 어머니는 내 기억력에 놀라시며 할아버지가 해소 천식을 앓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고교시절 폐결핵으로 1년 휴학하게 된 것도 그리고 내 기관지가 약한 것도 그 유전자 때문이라고 단정지으신다.
눈썹 터럭과 약한 기관지는 확실하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다.



오늘 점심때 아들녀석을 데리고 선지해장국을 먹으러 갔었다. 우리집에서 남자 둘만 좋아하는 음식이다.
멀어서 버스를 탔다. 정류소에 내리니 건너편이 식당이다. 도로 하나를 막고 공사중이었다. 공사 구간 앞 뒤로 수신호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데 그냥 건너가라고 수신호를 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고 마침 오가는 차량이 없어서 그런 모양이다. 미적거리는데 마침 녹색으로 신호가 바뀌어서 건널목을 건넜다.
그런데 우리가 건널목을 건너자마자 신호가 안바뀌었는데 이제는 차량한테 수신호를 보낸다. 차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빨리 지나가라고 운전자에게 짜증을 부린다.
기어이 내가 한마디를 한다.
"신호등에 맞춰서 신호를 줘야죠."
"뭐라고. 내 신호가 우선이야"
반말이다. 머리속에서 스파크가 튄다.
"누가 그래. 당신이 뭔데? 경찰이야 뭐야"
내가 돌아선다. 일촉즉발이다.
"아빠 그냥 가요"
아들이 낮게 속삭이며 내 팔을 끈다.

"아빠 아까 그 분이 신호를 잘못 줬어요?"
"신호도 안떨어졌는데 안지나간다고 차 운전자한테 되려 짜증을 내잖아."
아들은 한방울도 안남기고 선지해장국을 비웠다. 나는 밥 반공기를 덜어서 국에 말았는데 나머지도 제 그릇에 털어넣고 해치웠다.
"맛있지?"
"네....왜 반공기만 드세요?"
"원래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 부모는 배가 부른 법이거든..."
"ㅎㅎ 그럼 다 주시지. 반 공기는 왜 드세요"
"이 새끼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따지기는....ㅋㅋ"
"ㅋㅋㅋ..."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히 녀석의 배를 툭툭치다가 볼을 꼬집기도 하면서 장난을 걸었다.
"너 아빠가 왜 이러는지 아냐?"
"왜요?"
"그냥... 니가 좋아서 그러는거야. 할아버지도 아빠가 좋으셨을텐데 평생 표현을 안하셨거든... 아빠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아빠는 애정표시로 이렇게 장난치는 거 말고 잘 모르시죠?"
"그래. 임마.... 아빠도 서투르긴 마찬가진가 보다"
녀석은 선지해장국과 동치미를 좋아한다. 식성이 나와 닮았다. 식성도 유전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까칠하고 때론 거친 내 성격을 물려받은 것 같지는 않다.
훗날 녀석은 더 살갑고 다정한 아빠가 될것 같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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