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경소리

by 문성훈

"...... 그래도 니가 장남이 돼나서 그냥은 못지나가지싶더라. 고맙다"
어머니께서 내게 고마워하실 일은 분명 아닌데 고맙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셨다.
장남... 장남은 훈장도 멍에도 아닌 것을 잘 안다. 당신 시대에 자란 탓에 나는 장남으로 혜택을 온전히 누리며 자랐다.
부모님은 동생들이 철들 무렵부터 "오빠는....형은 부모 대신이다."시며 일찌감치 나를 당신 반열에 올려놓으셨다. 덕분에 누구보다 가죽운동화를 일찍 신어봤고 부당한 위세를 부리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나는 누렸을 뿐이지 베풀지 못하고 산다.

보광사. 선친을 모신 이곳은 언제 와도 경관이 좋다. 사시사철 모습이 다 다른데 여름에는 계곡을 찾는 사람이 몰려 안오게 된다. 납골당 입구에 9월30일부터 10월4일까지는 폐쇄한다는 큰 현수막이 걸려있다.
당신께서 살아생전 산을 잘 다니셨으니 그리 무료하지 않으실거다. 당신이 고향이 아닌 이곳에, 10남매인 당신 형제중에 처음으로 매장이 아닌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오시게 된 건 내 고집때문이다. 지척에 모시고 싶었고 자손들이 나들이 삼아서도 올 수 있는 곳에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종교와도 상관없었는데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부처님 곁에 모셔서인지 더 편안해하신다.

이번 추석은 처음으로 온 가족이 선친을 찾아뵙질 못한다. 어머니의 각별한 당부가 있으셨다. 혹시라도 내가 반대할까봐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다.
"이번 추석은 아무도 못오게하고 모이지 말았으면 한다."
"알겠습니다." 너무 선선하게 대답을 드려서인지 의외셨던 모양이다.
당신 역시 몇해전 폐 한쪽을 잘라내셨고, 동생네 조카들은 아직 어리다. 내가 아무리 고루하기로서니 사리부터 따지는데 혹시 고집을 피울까 염려가 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오늘 아침 우리가족만 서둘러 나왔다. 여느 날같으면 자고 있었을 시간인데 아이들도 가뿐하게 일어났고, 아내는 오전 약속을 미루고 따라나섰다. 아내와 딸은 자유의사에 맡겼는데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다행히 경내는 무척 한산했다. 아이들이 할아버지 모신 칸을 찾게 했다.
유골함 주민등록증 사진 속 아버지는 아직 젊으시다. 우리집 가장 막내인 조카는 사진 속에서 늘 웃고있다. 그 재롱에 적적하시지는 않으실 것 같다. 녀석이 태어나기 전에 당신은 오셨던 곳으로 돌아가셨다.
"OO아 할아버지 사리 본 적 있냐?" 선친 유골은 좁쌀만한 사리들로 만들어져 담겨있다.
"보다마다... 당신이 OO이한테 만져보게도 했잖아" 아들보다 아내가 먼저 대답한다. '그랬구나 이곳에 모시던 날 내가 그랬었구나...'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라고 마지막 모습을 그렇게 감촉으로라도 느끼게 했었다. 아이들이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그거 가지고 목걸이 만든다고 했잖아..."'딸이 그 얘기를 아는구나.' 처음 모실 때 좁쌀만한 유리구슬이니 목걸이 펜던트에도 조금씩 담아 우리 세 남매가 보관하면 어떨까 의견을 냈었는데 어르신들이 예법에 어긋난다해서 하지 않았다.
딸과 아들이 예전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왠지 대견하다.

납골당을 나와 경내를 찬찬히 둘러봤다.
오랫동안 공사중이던 대웅전 처마와 추녀는 이제 깔끔하게 정돈이 됐다. 천년고찰이니 이런 임플란트는 어쩌면 당연하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마당에 가득찼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조금전 아버지를 찾아뵈었노라 말씀드리고 스님 독경 들으시라고 폰을 법당 가까이 대드렸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이제껏 자식들이 만류를 했지만 당신 손으로 제수음식 몇 가지는 손수 준비하셨다. 무릎이 안좋아지시면서 "올해는 그것도 힘들겠다."고 하신지도 벌써 몇해가 지났다. 그런 당신이니 이번 추석을 건너뛰지 않고 자식이 이렇게라도 찾아뵈었다는 사실만으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신 듯 했다.
독경이 끝났다. 어머니 목소리는 더욱 편안해지셨다. 고맙다고 하셨다. 아마도 독경을 들으며 당신도 기도를 올리셨으리라.

부모는 자식의 당연한 도리에도 고맙다고 하신다. 사소한 마음씀씀이에도 감동하신다.
정작 당신은 우리를 있게 하셨으면서 그 큰 은혜를 베푸시고도 감사를 바라시지 않으신다.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 한번 하지않는 무뚝뚝한 아들에게 언제나 온 몸으로 사랑을 보여주신다.
도대체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무엇으로 만들었길래 이런 것일까. 신은 당신을 대신해 부모를 보내주셨음이 분명하다.
당신도 날아갈듯한 추녀처럼 치마폭을 나부끼던 젊은 날이 있으셨을텐데.... 지금은 살아계신 부처님이 되신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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