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까지 2주간의 격리 때문에 1월달에 온다는 우스개소리를 하게 되는 2020년이 저문다.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여행객이 되고 싶지는 않을테니 여행산업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오랜 감금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숨구멍을 트고자해서인지 그나마 제주행 항공편은 만석이라고 한다.
신혼여행이 유일하다시피했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여행은 이제 우리 일상생활 속에 안착된 문화가 됐다. 기성세대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가 되고보니 의미와 즐거움에서 최고라는 여행이 어떤 식으로 우리 삶에 파고드는지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한국에서의 여행은 관광버스춤로 대표되는 관광에서 시작되어 팩키지 단체 여행 그리고 자유여행으로 발전해온 것 같다.
형식은 그런 단계를 거쳤다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주마관산격으로 어디를 가봤다든지 몇 개국을 돌았다는 기록갱신형 관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렇잖아도 갑갑하던 차에 어제는 바람 쐬러가자는 지인의 문자에 올라타서 가까운 섬을 다녀왔다.
지인은 20년전 부친이 그 섬에 땅을 사서 농막을 짓고 텃밭을 일궈왔던터라 수없이 드나들었으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세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있기도 했거니와 영종도 선착장에서 십여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섬이라서인지 여느 바닷가 어촌의 풍경을 닮아 있었다. 지금도 주말이면 트레킹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여름에는 인파가 몰려 자신도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폐교한 초등학교가 두개나 됐는데 펜션은 등록된 것만 60개라고 했다. 짓고 있는 건물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염전은 줄어드는데 그 땅을 서울 사는 외지인이 사들이고 있다고도 했다. 몇년 내에 육지와 다리가 놓여질거라는 개발계획이 이미 발표되었다고 했다. 머지않아 이 섬은 지명으로만 존재하게 될 것 같다.
두어번 프랑스 파리로 출장을 갔었다.
모두 에펠탑까지 도보거리인 호텔에서 묵었었다. 그런데 에펠탑은 마지막 출장에서 동료들과 한번 올라갔었다. 처음으로 파리 전경을 볼 수 있었다. 혼자만의 출장에서는 낮의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파리 뒷골목을 쏘다니다 밤늦게 돌아오곤 했다.
배트맨이 쓸 것만 같은 가면과 붉은 수술이 달린 가죽 채찍, 차갑운 금속 수갑이 진열된 진귀한 가게를 지나면 지린내가 풍길듯한 좁은 길이 가지뻗은 골목길. 흐릿한 가로등에 울퉁불퉁한 바닥 돌들이 해변에 깔린 조약돌처럼 빛났었다.
그 길을 책으로 다시 거닐었다. 반가웠다.
"우리는 며칠째 생라자르 역 뒷골목의 싸구려 여인숙에서 묵고 있다. 큰길에서 조금만 들어오면 악취가 진동하는 좁다란 골목길이 나온다. 초저녁 사방이 어둑어둑해오면 성인용품 가게에서는 휘황한 불빛이, 맞은편 중고 서점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골목을 따라 스무 명 남짓한 여인들이 문간에 기대 줄담배를 태우고 있다. 번들거리는 비옷을 활짝 풀어헤치고 짧은 치마에 싸구려 부츠나 하이힐을 신은 여자들이 B급 영화 속 첩자처럼 반쯤 내리감은 눈으로 거리를 응시한다..... 우중충한 여인숙 입구에 들어선다. 데스크 위 벽에 '코메디 프랑세즈'의 포스터가 처량히 찢어져서 너덜댄다..... 한 여인을 사랑하지만 사랑 받지 못하는 사내. 그가 사랑하지만 품에 안을 수 없는 여인. 그녀의 이름은 록산이다.
그날 밤 나는 여인숙 방으로 올라와 한 소녀를 노래한다. 그녀의 이름은 록산이다. 화대도 제대로 못받는 어린 여자 아이가 여인숙 아래 골목에 오도카니 서 있다. 나는 이 아이에게 '시라노 드 메르주라크'의 낭만과 슬픔을 덧입힌다. - 스팅(자서전)"
내가 헤집고 다니던 골목길이 스팅이 묵었던 숙소의 그 골목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스팅은 그 곳의 정경과 포스터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음악인생에서 전기를 마련한 첫 히트곡 '록산'을 작곡했다.
Roxanne, you don't have to put on the red light
Those days are over
You don't have to sell your body to the night
Roxanne, you don't have to wear that dress tonight
Walk the streets for money
You don't care if it's wrong or if it's right
록산, 그 빨간불 킬 필요없어
이제 그런 일은 하지마
더이상 이 밤에 몸을 팔지마
록산, 오늘밤 그 드레스 입을 필요 없어
돈때문에 거리를 헤메는 넌
그게 잘못인지 아닌지 상관않지만
에펠탑과 자유여신상으로 널리 알려진 귀스타브 에펠이지만 의외로 시장을 많이 설계한 인물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베트남 멀리는 페루의 전통시장까지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당시로는 최고 높이를 자랑하던 파리 광장의 에펠탑과 적나라한 삶의 속살이 드러나는 페루의 전통시장이라니 왠지 의외다.
공간 디자인을 하는 내게 화려한 거죽을 내려다보는 전망대와 신산한 삶의 속살이 드러나는 시장이 주는 감흥은 남다르다.
우리는 누구나 안팎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시선의 높이가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잠시 머물기만 할뿐 온전히 혼자만의 시선을 밖으로만 돌리게 하는 에펠탑과 살아 숨쉬는 생존의 현장으로 서로의 숨결을 건네는 내 안으로 향한 시장이다.
장엄하고 때로는 위협적이기까지 한 에펠탑의 위용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전통시장은 수북히 쌓인 값싼 농작물과 말린 개구리 그리고 손발짓으로 오간 흥정을 화제에 올린다.
에펠탑은 표를 끊고 엘리베이터를 타서 오르지만 시장에는 입장료도 문턱도 없다.
땅값이 올라 원주민에게 돈자랑을 하면 안된다던 그 섬에도 찬바람 맞으며 갯바위에서 굴을 캐던 곱은 손의 아낙들이 있었다. 물 빠진 갯벌에서 고무 대야를 끌며 낙지 구멍을 찾아다니던 초로의 사내에게서도 고단한 삶이 묻어나왔다.
그런데 귀스타브 에펠의 대표작을 봐도 전통 시장들의 이름은 올라가 있지 않다.
파리와 뉴욕의 휘황찬란한 야경을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에서 내려다 보는 사람들의 기록에는 원초적인 살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세계인은 스팅의 '록산'에 환호하고 갈채를 보낸다. 도심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와 캐롤이 울리는 샹젤리제 거리보다 악취 풍기는 파리의 어둑한 뒷골목을 헤메던 밑바닥 인생을 노래한 그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그것이 진짜 우리네 삶이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