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잊은 그대에게

제주

by 문성훈

바다를 들여놓은 카페. 한껏 폼을 잡고 책을 읽는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조립식 독서대는 아무리 봐도 기막힌 발명품이다. 특허라고 했다. 접이 부채만 한 것이 펼치면 암팡지게 제 몫을 한다.

바다는 해안가에 돌담으로 둘러 싼 얕은 풀장을 만들었다. 꼬맹이들이 튜브를 띄우고 논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익숙하다. 최근들어 딸아이가 흥얼대던 팝송이다. 음악 검색 앱을 켜서 제목을 알아봤다. 그리고 딸아이에게 톡을 날렸다.
“니가 밤마다 부르던 노래 Levitating이구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데 그거네.”
“웅 맞아. 히히”
늦잠을 잤을 딸아이는 아마 아빠가 제주도인 걸 모를 것이다.

카페에 머무는 동안 맞은 편 테이블에는 두 그룹이 다녀갔다. 중년의 남녀. 호칭으로 형부와 처제란 걸 알았다. 그리고 젊은 부부 한 쌍과 투자 브로커였다. 그다지 가깝지 않은 거리인데도 그들의 대화가 책갈피 사이로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
“형부. 남자들은…. 이쁘다면 좋을거라…. 천만에요. 사람들이 꼬이니 훨씬 많이 속고…. 훌쩍…. 그러니까요. 형부 생각은 알았고요…. 제 인생이죠…. 훌쩍…. 안다니까요.”
아마도 혼자 된 처제의 얘기를 들어주는가 보다. 보아하니 형부는 ‘라떼’를 시연하는 중이다. 처제가 답답해 한다. 비슷한 또래에도 세대 차이가 나나보다.

둘이 비운 자리를 이내 젊은 부부 한 쌍이 채운다. 덩치좋은 사내가 넉살좋은 인사를 건네며 맞은 편에 앉는다. 부부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로 듣는 쪽이다.
“주식이란 게….. 한국 부동산도 보세요….. 이율이…. 지금이 시기죠…… 정부 정책이…. 이런 얘기 누가 들으면 안되는데 제가 오래 전에 CJ주식을…. 그랬다니까요… 허허허… 믿으시면 됩니다….. 그러믄요.”
갑자기 볼륨을 줄였던 대목 ‘이런 얘기 누가 들으면 안되는데…’를 하필 가장 정확히 들었다. 화장실을 가며 마침 그의 옆을 지나치던 중이었다.
누가 들으면 안되는 비밀을 그 부부가 들었고 나도 들었다. 낮이건 밤이건 새도 쥐도 그리고 사람들이 다 듣는다. 남이 들어서 안될 얘기면 안하면 된다. 굳이 말할 때는 들으라고, 들어줬으면 하고 바래서 하는 말이다. 한 눈에도 신뢰가 안가는 인물이다. 그는 언젠가 본 뉴스에 나온 누런 골판지를 썰어넣은 가짜 만두소을 채운 만두를 판 중국인을 연상케 했다. 뭔가 미심쩍은 불량한 재료를 ‘누가 들으면 안되는데…’라는 만두피에 싸서 시식을 권하는 중일 것만 같다.
창밖에선 누군가 해변가 자연 풀장에서 놀던 아이들을 타월로 감싸서 데리고 간다. 구부정한 허리. 느린 걸음 아마도 할머니인가 보다. 아이들이 놀던 물자리를 바람이 바지런히 쓸어낸다. 다시 잔잔한 물마루가 깔렸다.

5시가 다 되어간다. 숙소에 가야 할 시간이다. 졸다 깨다 읽어서인지 책장은1/3가량이 남았다. 이전에 읽었던 책이긴 하다. 모네의 에세이다. 이번에는 그림을 더 유심히 본다. 그림 설명을 일부러 안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익숙하고 날렵한 솜씨로 가방을 싸고 깨끗하게 자리를 정돈한다. 오랜 시간 빌려 쓴 값을 치르는 오래 된 루틴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리조트 입장은 아마 2시일 것이다. 물론 오전에 가도 기다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너무 늦으면 경관 좋은 방을 잡기 힘들 지도 모른다. 포니만한 내 애마는 한라산 중턱을 타고 오른다. 포니는 조그맣지만 엄연하게 말이다. 언젠가 본 다큐에서 목장 주인이 발정 난 포니 수컷이 제 몸의 두 배는 될 법한 암말에 올라타려는 걸 말리느라 혼쭐이 나는 장면을 봤었다. 사방이 바다인 섬에 와서 산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녹음이 상쾌하다. 눈으로 온 몸으로 한껏 들이킨다. 와라 더 와라. 너를 마시러 온 것이니.

늦은 오후인데 리조트에는 서늘한 운무가 낮고 희미하게 깔려 있다. 자다가 깼다면 이른 새벽으로 착각할 만큼 상큼하다.
“이틀 예정이시죠.”
“잘 모르겠습니다. 더 있을 수도 있고요. 전망 좋은 방으로 부탁합니다. 요양 중이라….”
“네. 알겠습니다.”
요양이 별 건가. 심신을 다스리고 원기를 차리려는 것이면 요양이지. 도심을 앓다 오지 않았는가. 어쨌든 아프다거나 병중이라고는 안했으니까.
방을 찾아가는데 같은 동을 배정받은 부녀가 앞서 가고 있다. E리조트는 회장이 알타미라 동굴에 매료됐는지 벽화는 없어도 둥근 천정의 긴 회랑이 특징이다. 십대로 보이는 딸이 제 몸집의 반은 됨직한 트렁크를 끌고 간다. 군데 군데 계단 턱이 난관이다. “아빠. 이거 좀…” 이런 건축방식은 아파트에 익숙한 도시인에게 불편하다. 대지를 평평하게 깎지 않아서 그렇다.
사람에게는 불친절하고 자연에게는 고개 조아리고 거스리지 않으려 한다. 일부러 자연을 찾았으면 그렇게라도 겸손을 배울 일이다. 나는 그래서 이 곳이 더 좋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문을 여니 맞은 편 창으로 숲이 펼쳐져 있다. 어른 팔뚝만한 나무의 껍질만 다듬은 구불텅한 베란다 난간은 이 리조트의 시그니처다. 날이 좋으면 멀리 바다의 자락도 잡힌다. 여장을 풀어놓고 이내 길을 나선다. 저녁을 먹어야 한다. 내일 아침 땟거리도 챙겨야 한다. 저녁 식사도 사와서 숙소에서 먹을 참이다. 재래시장으로 간다.

내 생각에 제주에서의 먹거리 여행은 어색하다. 광산촌을 가서 보석상을 찾는 격처럼 느껴진다. 물질하랴 새끼 챙기랴 삶이 신산했을 제주 어멍에게 음식은 하루를 건너는 징검다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실제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제주 토속음식은 그렇게 만들어 먹던 것이다. 물질하다 허기지면 장작 때서 챙겨온 고기 덩어리와 지천으로 널린 해초를 푹 끓여내거나 내다 팔지 않을 생선과 바닷바람 맞고 자란 배추를 숭덩 숭덩 잘라 만든 것이다. 제주 흑돼지도 측간에서 떨어진 대변으로 키우던 전통적 생활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똥돼지는 맛이 좋다. 안된 말이지만 보신탕 성애자들이 개고기가 맛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사료로 키운 개여서 그렇다.
그러니 제주에서는 예사롭지 않고 아렸던 숨겨진 지난 역사과 이곳만의 독특한 문화를 찾아 볼 것이다. 보석상 대신 원석 박힌 광산 동굴 체험이 제격인 것이다.

타지에서 딱히 맛집을 찾지 않을 때는 재래시장만한 데가 없다. 사람들이 제법 북적인다. 흑돼지 김치말이를 사려했는데 줄이 길다. 블로그 간접광고의 힘이 제주까지 미친다. 미련없이 포기하고 흑돼지 전복 버터밥을 산다. 횟감을 조금 사고 막걸리 두 통을 챙겼다. 우도 땅콩 막걸리와 가파도 청보리 막걸리다. 다른 게 섞이지 않은 쌀이나 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제주를 혀끝으로 감상할 요량이다. 오메기 떡을 샀다. 간편한 아침식으로 제격이다. 음료는 감귤주스다. 횟감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맞은 편 주스가게가 너무 한산했다. 가게 주인의 딸인지 알바생인지 어린 아가씨 혼자 냉장쇼케이스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라봉, 풋귤, 감귤, 망고가 재료다.
“뭐가 맛있을까. 손님들이 뭘 많이 찾아요? 풋귤은…?”
“한라봉이나 풋귤요. 풋귤은 달달한데 끝 맛이 살짝 써요.”
“그래요. 단 건 싫은데 뭐가 가장 안달죠?” “감귤요”
“그걸로 주세요.”
원래 우유를 사서 가려고 했었는데 감귤쥬스로 바뀌었다. 장 본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리조트로 돌아간다.

네비가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안내한다. 구불 구불하고 더 가파른 좁은 길의 연속이다. 그래서 차창 밖 풍경은 더 흡족하다. 농원이라는 팻말이 군데 군데 눈에 띈다. 잘 다듬어진 넓은 정원에 유럽 고성처럼 불쑥 솟은 집들이 이채롭다. ‘누가 살까? 저기를 외갓집으로 둔 꼬맹이들은 신나겠다’ 혼자 싱글대며 덜컥거리는 산악레이싱을 즐긴다. 장 본 것을 현관 안에 넣어놓고 다시 리조트 안에 있는 편의점으로 간다. 버터밥이 다소 느글거릴 지 모르니 김치가 필요하다. 꼬마김치 하나와 비상시를 대비한 사발면 그리고 생수 한 통을 사서 돌아왔다. 장 본 것과 합치면 족히 2~3일도 버틸 수 있다.

그때 톡 알람이 울린다. 리조트에 와서 사진 몇 장을 보냈더니 그제서야 내가 제주 갔다는 걸 딸아이가 알았다.
“아빠 언제까지 잇냐거. 나 갈래”
괜한 짓을 해서 혹을 붙였다.
“얼마나 있을지는 몰라….. 와! 근데 아빠 명상 방해만 하지 마.”
10분도 안돼서 항공편 예약문자를 캡쳐한 사진이 올라왔다. 7,000원 짜리다. 내일 저녁 늦게 도착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저녁식사로 흑돼지 버터밥을 절반만 먹고 냉장고에 넣어뒀다. 회와 막걸리 한통 들어갈 위장을 비워둬야 한다. 회도 절반만 따로 담았다. 우도 땅콩막걸리부터 마시기로 했다. 전에 먹어봤던 것 같기도 하다. 땅콩 맛이 그리 거슬리진 않는다. 회 반접시, 막걸리 한 통을 비우고 설거지를 끝냈다.
나도 모르게 씻지도 않고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자정이 넘었다. 어제 밤을 샌 탓이다. 밤 산책을 나갔다. 서늘하고 습기 머금은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한다. 오늘 밤은 다 잤다. 지새우더라도 피곤할 것 같지는 않다.

내일 저녁에는 예정에 없었던 딸아이 공항 마중을 가야한다. 딸아이는 지금 학원과 과외 알바 중이다. 학원 근무하고 과외는 미루고 온단다. 성격부터 전격적이고 행동파인 것까지 빼다 박았다. 원죄는 내게 있으니 죄값을 달게 받아야 한다. 내일 밤 도착인게 어딘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고(苦) 로 수행의 문을 삼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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