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고 즐긴다면 뭔가 뽀대도 나고 근사하다.
그런데 실상 내 여행은 가출이거나 나들이에 가까울 때가 더 많다. 그냥 길을 나서는 거고 문득 떠나는 거다. 대책없고 충동적인 성격이 한 몫 한다.
물론 작정하고 오랜 준비 끝에 여행이라고 부를 만한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동행이 있거나 멀리 그리고 오랜 기간이 걸릴 때다.
5년전 가족여행으로 북유럽을 갔을 때가 그랬다. 몇 개월 전부터 동우회카페에 가입하고 블로그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한달 전부터는 가지고 갈 김치를 포함한 식재료를 건조시키는 작업에 돌입했다.
'시집가는 날 등창 난다'고 출발 일주일 전에는 내가 복막염 수술까지 받았다. 영문진단서 떼서 의사의 놀라는 입이 다물어지기도 전에 비행기에 올랐다.(직항아닌 싼 경유노선으로)
차량 렌트비가 싼 독일의 함부르크에 도착해 차를 인도받아 북쪽으로 달렸다.매일 500Km이상을 운전했고, 대부분의 숙식은 캠핑장에서 해결했다. 한, 두번 외식했을 뿐이다. 네 가족의 총 여행경비를 얘기하면 믿는 사람이 별로 없다.
출발 전 친구들은 '팔자가 좋다'고 부러워했다. 내심 돈 좀 벌었나보다 시샘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크루즈 여행으로 세계일주라도 다녀올 수 있는 부자들이고,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아니다. 역마살이 끼어서 그랬고, 사업은 적자 누적으로 언제 문을 닫을 지 몰랐다. 계약 직전의 프로젝트도 포기하고 떠났다. 대입을 앞 둔 큰 애 담임은 의사보다 더 당황해했고, 아내는 내 수술 때문에 미루고 싶어했다.
하지만 곧 성인이 될 아이들과 얼마나 더 여행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가족 모두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추억과 경험이 될 거란 확신이 그 모든 장애와 우려를 떨쳐버리게 했다.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내 인생에 여행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은 다 그랬다. 무모했고 가난했으며 절박했다.
'주무십니까?' 토요일 자정쯤에 지인에게서 톡이 왔다. 다음날 가족들과 신도에 있는 농막에 갈텐데 같이 가자고 했다. 월요일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월요일 오전에 백신 접종이 있어 사양했다. 그런데 어찌나 집요하게 설득하는지 그 마음이 고마운데다 언제나처럼 가고싶은 마음이 모든 걸 제압했다.(실은 까먹는 거다) 일요일 다른 일정이 있는 아내까지 흔들어 합류하게 만들었다.(아내 역시 월요일 오후 접종이었다)
부부끼리 막역한 사이지만 5.5평 농막에서 어른 넷, 아이 둘이 한 방을 써야한다. 여의치 않으면 남자어른 둘은 차에서 자면 된다.
"백신 접종 전에 충분한 휴식과 비타민 섭취를 해야한다는데 술마셔도 괜찮을까?" 아내가 걱정을 했다.
"백신 맞고나서 그래야하는 거 아냐?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는 이러는 게 더 나을껄..." 맞거나 틀렸거나 이미 저질렀다.
선착장에 늘어섰던 긴 차량 대기줄에 비해 항해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섬 바람은 선선하고 수평선은 한가로웠다.
주변에는 인가도 없는 외딴 농막이다. 저녁이 되자 모닥불을 피웠고, 고추 따고 대파 뽑아서 삼겹살을 구웠다. 모기도 오랜만에 서울사람 메뉴로 배를 채웠다. 연신 피운 모깃불에 오히려 사람이 훈연될 판이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새벽 2시까지 광란의 밤을 보냈다. 스마트폰 MR에 맞춰 아이들까지 돌아가며 노래부르고 춤을 췄다. 흡사 작은 섬나라 축제처럼 놀았다. 취기가 도니 모기 물린데가 가렵지 않아 좋았다
열통이 넘는 막걸이를 다 비우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횡으로 종으로 몸을 뉘니 방은 그다지 좁지 않았다. 불을 끄고나서 장난끼가 발동한 내가 모두에게 물었다.
"무서운 이야기 해줄까? 실환데..."
아이들은 해달라고 난리고, 겁많은 아내만은 싫다고 했다. 아내에게 귀를 막게 하고 괴담 한 편을 풀었다. 다들 경악하고 환호했다. 앵콜 요청은 아내의 제지로 사양했다.
아내만 잠들면 더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지 중학생인 그 집 딸이 자꾸 아내에게 묻는다. "이모 자요?" "이모 잠든 거죠?" 그렇게 아내가 잠들만 하면 깨우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7시가 조금 넘었다. 의원은 9시에 문을 연다. 다른 사람들은 깰 기척이 없다. 다시 잠을 청했다 깨니 아내가 손가락으로 전화하는 시늉을 해보인다. 접종시간을 오후로 미뤘다. 대체공휴일이라 3시 30분까지는 와야 한다고 했다.
아침은 황태해장국이었다. 두 그릇을 비웠다. 백신 접종 준비로 그걸로 충분하다. 나무 그늘 아래 캠핑의자에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여자 어른 둘은 연한 호박잎을 땄다. 우리 부부가 먼저 섬을 떠났다.
집 근처 의원에서 백신을 맞았다. "보고된 바는 없지만 언제든 부작용은 있을 수 있다."는 의사 말에 오히려 안심이 됐다.
1박 2일 짧은 나들이가 차질없는 백신접종으로 마무리됐다.
마음만 먹으면(약간의 무모함과 충동성이 가미되면 금상첨화다),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불편을 감수하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게 가출(여행)이란 말을 하고 싶었는데 길어졌다. 그래서 전혀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