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어리로 살았다면 이제는 세꼬시쳐서 살고 싶어. 그리고 아주 허접하게...."
'나와 세계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그로써 한 시간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더없이 행복하다.
누군가 나보다는 어렸으면 좋겠을 사람이 "사는게 뭡니까?"라고 묻는다면 말없이 건네 줄 책 한 권쯤은 있는 사람이고 싶고, 권할 만한 영화를 막힘없이 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라는 뜻이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표현이다.
던 월(Dawn Wall)은 그런 내가 그나마 가리킬 수 있는 암벽이다. 1시간 41분 짜리 다큐멘터리이고 넷플릭스에 있다.
나로서는 버거운 거대 담론에 짓눌리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이고 핑계가 되는 셈이다.
어떤 영화는 줄거리를 말하고 싶고 또 어떤 영화는 감상과 부연 설명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보라고만 하고 싶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아주 느리고 지루하더라도 혹은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내 생각의 공극을 한없이 별려주는 영상이 좋다.
던 월이 그렇다.
그냥 삶은 이런 거라고 누구나 이런 순간이 오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냥 암벽을 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삶의 모든 걸 보여준다. 내게는 그렇다.
쉬흔 살 즈음에 아내가 어느 모임에서 추천받았다면서 <나는 걷는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1권을 선물했다. 추천한 사람이 "그 연배의 남편에게 권할만한 책인데 좋아하고 맞는 분이라면 2,3권도 사보실겁니다."라는 말까지 그대로 전해줬다.
500쪽가량되는 꽤 두꺼운 책인데 멈추지 않고 읽었다. '단숨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수사다. 그가 묵묵히 걸었던 것처럼이 얼추 가깝다. 그리고 2,3권을 샀다.
그냥 걷는 이야기이다.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왜인지, 실크로드나 지나치는 고대 도시 이름 따위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마치 영화가 감명 깊었다고 등장인물의 이름과 배우, 감독, 수상내력을 읊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저 저자가 걷듯이 읽으면 되는 책이다.
그래서 함부로 또한 권할 만한 책은 아니다. 동반한다고해서 자꾸 어디쯤 왔느냐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면 곤란하다.
호불호가 갈릴만한 책인데 애먼 사람에게 권했다가 비슷한 감상을 못느꼈다는 말을 들으면 매력적인 여인의 빈 옆자리에 합석해도 되냐고 물었다가 거절당하는 느낌이 들테니까.
던 월(Dawn Wall)은 '나는 걷는다' 그 책보다는 친절한 다큐멘터리다.
누구도 선택할 수 없는 부모와 성장, 영원할 것만 같은 사랑과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그리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때로는 진짜 중요한 것들은 언어로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도 일깨운다.
생각의 공극.
그 간격이 손가락 끝으로만 겨우 감지할 수 있는 바위의 비좁은 틈에 불과하더라도 생사를 걸만하다는데 동의할 수 있다면 그로써 족하다.
사색, 사유, 성찰 거기에 철학까지 큰 담론을 이고 살기에 우리 대부분은 너무 왜소하고 수명은 바램보다 짧을 게 분명하다.
불과 혹은 누군가에게는 무려일 914m 엘 캐피탄(El Capitan)암벽을 무엇으로 산정하든 상관없다. 목표, 정상, 성공 심지어 여자여도 좋다.
여정을 삶, 사랑, 경영 어떻게 해석하든 "사는게 도대체 뭡니까?"란 질문에 명쾌하고 간결하게 답할 수 없는 내가 말없이 손 끝으로 가리킬 만한 암벽이고 거기에 사람 둘이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