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젠트리피케이션

by 문성훈

우리 가족은 이집트 해변 레스토랑에서 간만의 휴가를 줄기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현지 이집트인 어부가 숭어 낚시를 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조과(釣果)가 시원찮아 보여 포인트로 보이는 바위를 추천해 주었다. 많이 낚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어부가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죠?"

"빠른 시간에 많이 낚아 저녁 찬거리로 쓰고 나머지는 시장에 내다 팔면 되지 않겠소" 내가 답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어부가 다시 물었다.

"빠른 시간내에 많이 낚아 시장에 내다팔면 어선도 구입할 수 있고, 어선이 있으면 더 깊은 바다에 나가 큰 그물로 더 많은 물고기를 낚을 수 있을테고, 그러면 머잖아 선주가 되어 사람들은 당신을 선주라고 부르게 되지 않겠소"

"아니 내가 왜 그렇게 해야되냐니까요?" 또다시 묻는다.

현대사회에서 야망과 속도에 익수해진 우리에겐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큰 어선이 있으면 금방 많은 물고기를 잡아 생선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 되어 생선 가격을 마음대로 정하고 더 많은 어선을 사서 선단을 이루고 마침내 조기 은퇴해서 호화여행을 다니거나 바닷가에 앉아 낚시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어부가 말했다.
"나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거 같은데요?"

사이먼 가필드의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의 머릿말에 나오는 일화를 각색했다.
저자는 이집트인 어부의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말하려했지만 나는 달리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해변과 바다는 본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일몰을 마주하고 낚시대를 드리운 어부의 자리에 따로 주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어부는 매일같이 해변을 청소하고, 바닷가에 쓸려 온 쓰레기를 치우며 그 자리에서 낚시를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레스토랑 창가에서 보이는 어부의 자리가 포토 존이 되어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어부의 자리는 친구가 언니과 공동명의로 받은 유산이다. 갑자기 외국에 나가있던 친구의 언니가 찾아와 자릿세를 올려야겠다고 한다. 심지어 독신인 동생에게 둘 중 누가 먼저 죽으면 그 자리는 남은 1인의 차지라는 유언장 작성까지 요구한다.

어부가 낚시하던 자리가 유명해진 것은 아름다운 바다와 해변 때문이다. 그리고 매일같이 해변과 바다를 제 것처럼 아끼고 가꾸덤 어부의 모습이 그림과 같았기 때문이다.

어부의 자리를 빛나게 했던 바다와 해변은 누구에게 양도 할 수 있는 것인가?

어부는 어떻게 해야할까? 더 많은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기도, 선주가 되고 싶지도 않은 어부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행동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바다와 해변은 그 곳을 찾는 모두의 것이다. 그것들로 인해 어부의 자리가 빛날 수 있었고 온전히 지키려는 어부의 노력이 사람들을 그곳을 찾게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매몰차다.
주인들 중 한사람은 어부가 고기나 많이 낚아서 수익을 올리고 자신은 자릿세를 더 받아 부자가 되길 원한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바다와 해변은 자기 것으로, 덤으로 여긴다.

시장에 내다 팔 정도로 많은 고기를 원하지 않는 어부는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언니는 자리를 비싸게 팔고 떠나면 그만인데 동생의 처신이 문제다. 바다와 해변에 추억을 가지고 있고, 그 가치를 아는 동생이라면 처분에 반대해야 한다. 자매 간의 문제가 아니다. 자매가 세상을 떠나도 그 자리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선다면 일몰의 장관은 가리워지고 만다.

이제 어부를 찾아오던 사람들과 건너편 레스토랑 창가에서 바다와 해변을 바라보던 손님들의 문제가 남았다. 바다와 해변은 우리 것이니 훼손하지도 가리지도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까? 모르긴 해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낚시로 부자가 되고 싶은 어부보다 한가로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찾아오던 사람들과 어울리던 그 어부를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그래서 우리가 그 곳을 찾았던 것이니 어리석은 짓 그만두라고 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