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콰해져서 하는 취타는 그만두기로 작정했는데 다행히 어제밤은 써놓고 엔터키를 누르지 않았다. 밤에 쓴 연애편지보다 더 머쓱해지는 순간은 취해 쓴 글을 다음날 아침에 보게 될 때다.
어젯밤. 집에 들어오니 아들은 노트북과 모니터로 식탁 주변을 게임방으로 만들어 놨다. 헤드폰을 끼고 조원들과 통신하랴 전투하랴 정신이 없다.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 물끄러미 쳐다본다.
"왜요? 아빠"
"할 얘기가 있어서..."
"잠깐이면 지금 하셔도 되는데 길면 이거 끝내고 하면 안돼요?"
"짧을 것 같진 않네. 끝나면 말해"
노트북을 펼쳤다. 갈증이 났다. 물대신 마실만한 걸 찾아보니 석류즙이 든 박스가 보인다. 석류에 여성호르몬이 풍부하다고 했다. 마셨다가는 그렇잖아도 근자에 눈물이 많아졌는데 얘기하다 훌쩍거릴지도 몰라 외면한다. 물 두잔을 연거푸 마시고 타이핑을 한다.
왠만한 대도시 역 근처에는 관광호텔이 있다. 마산역 앞에는 아리랑관광호텔이 있다.
오래전 무슨 계기였는지 기억은 나지않는데 외가 식구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여행을 떠났다. 집합장소가 마산역이었다. 일찍 도착한 어르신들은 호텔 커피숍에서 담소를 나누면서 나머지 분들을 기다렸다.
모두 도착해서 버스에 오르고 있는데 호텔에서 한 신사가 쫒아나온다. 잘 정돈된 짧은 머리며 옷 매무새가 호텔 관계자인듯 싶은데 젊지는 않으니 책임자급인것 같다. 당신 앞에 멈춰서 90도 인사를 하는데 이내 손을 맞잡는 품이 서로 아는 사이인걸 짐작할 뿐이다. 잠시 니밀락내밀락 실랑이가 있는 것 같더니 당신은 버스에 오르셨고 그 신사는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그 정황의 내막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셨다. 짐작했던대로 그 신사는 호텔 책임자였고 직원을 통해 큰외삼촌 일행이 다녀가셨다는 말을 전해듣고 급히 쫒아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한사코 돈이 든 봉투를 전했다고 했다. 당시에 이미 큰외삼촌은 공직에서 정년퇴직하신지 오래된 노인이셨다.
"구청장님. 형제분들과 가시는 귀한 여행인데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요."
나는 당신의 공직생활은 어떠했는지 모른다. 다만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분으로 기억되는지 그리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얼마나 따뜻한 심장을 가신 분이신지는 안다.
"옛날 힘있고 높은 자리있을 때 우찌 했으면 이빨 빠지고 털 다 빠진 지금까지 그라겠노?"
굳이 어머니의 사족이 아니어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날의 사건은 내가 익히 보고 들은 수없이 많은 에피소드에 하나를 더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마음으로 베풀고 넉넉한 품에 들이셨던 어른이시다.
큰외삼촌은 어릴적부터 나의 멘토이자 롤모델이었다. 어머니는 늘 내가 성격부터 마음씀씀이, 하는 짓까지 큰외삼촌을 빼다박았다고 했다. 어머니의 바램이 그렇게 보이게끔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에는 신경질적으로 뱉는 말투와 날카로운 인상까지 포함된 말이었다.
육남매의 맏이셨던 당신의 처신을 닮고 싶었고, 살아온 행적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발치에도 못미친다는 걸 안다. 자괴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어머니의 처녀시절. 어두워지면 집 밖 출입은 엄두도 못내던 당시에 할아버지 할머니 몰래 용돈을 쥐어쥐며 친구들과 서커스 구경을 다녀오게 해줬던 분이 큰오빠 당신이셨다.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 외갓집 동네 점방에서 눈깔사탕이며 꽈배기를 무시로 덥썩 집어올 수 있었던 것도 당신 빽을 믿어서였다.
나의 대학시절 향토장학금은 당신을 비롯한 외갓집에서 보내신 것이었다. 나는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됐다.
등록금을 못낼 살림은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외갓집에서는 우리집이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가난해서였을 것이다.
당신은 까까머리 중학생으로 피신한 좌익 시인이던 큰아버지 대신으로 거제포로수용소에 끌려가셨다가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나셨다. 선거때마다 그랬지만 김대중 찍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시던 분이다. 까칠하고 거침없는 나였지만 그러겠노라고 군말없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 것도 당신이라서였다.
삼년전. 돌아가시기 두어달 전에 찾아뵀던 게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흔까지는 거뜬하실줄 알았는데 암투병으로 무척 쇠잔해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막내동생과 마산으로 내려갔다. 어릴 적에 새배를 갔던 그 아파트였다. 당신은 자꾸 고맙다고 하셨는데 나는 "잘 커줘서 기특하다."로 들으려 했다. 내가 당신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아마 쾌차하실거라는, 더 오래 사셔야한다는 속없는 말을 했을 것이다. 당신 손등의 도드라진 핏줄을 만졌고 검버섯을 셌던 기억만 남아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오려는데 굳이 몸을 일으키셨다. 나는 오래전 그 신사가 그랬던 것처럼 동생과 마련한 봉투을 드렸다. 나는 용돈이라며 어색하게 웃었고 당신은 고맙다며 우셨다. 여유있는 노후에 있으나 마나한 그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일게 분명한 조카의 용돈이었다.
당신이 베푸신 것에 만분지 일도 안되는 보잘것 없는 것에 당신은 고맙다고 우셨다. 나는 굳이 "먼길 오느라 수고했다"라는 말로 들으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린 날 떼쓰던 것처럼 주저앉아 펑펑 울 것만 같았다. 그러면 또 그때처럼 먹보조카 손을 끌고 점방에 데려다 주실 지도 모른다. "아나! 골라봐라... 하모~! 니 묵고 싶은만치... 얼마든지..." 하시면서...
수백, 수천년 뿌리를 뻗는 고목처럼 어린 것들에게 물과 양분을 나눠 주실 줄만 알았다. 그렇게 숲을 이루고 병풍이 되어 비바람을 막고 그늘을 드리우리라 막연히 믿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당신은 떠나셨다.
당신의 기일이었다. 스마트폰은 일찌감치부터 매년 이 날을 잊지말라고 알려준다.
옆 방 ㅇ교수가 저녁을 뭘로 먹겠냐고 했다. 좀 멀더라도 남대문 시장에서 갈치조림을 먹자고 했다. 막걸리를 시켰다. 그러려고한 건 아닌데 시골 이야기를 나누다 외갓집 얘기로 이어졌다. 두 병째를 시켰다. 술을 하지않는 그가 한 잔을 마시고 나머지는 내가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외사촌형에게 전화를 했다. 제사를 지내는 중인지도 모를 시각이었다. 이미 제사는 마쳤고 막내외삼촌 내외분도 떠나셨다고 했다. 또 형이 그놈의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것도 무슨 유전인가 싶다. 정작 받은 이는 멀거니 있는데 베푼 이가 고맙다고 하니 말이다. 형 목소리를 들으니 코끝이 찡해지는 건 막걸리의 탄산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막내외삼촌께 전화를 드렸다. "그래. 후이가? 큰 기제...오이야..."
외갓집에서 나는 훈이거나 동생과 구분지어 큰 훈이로 불린다. 아마 훈이란 말을 자꾸 듣고 싶었나보다. 막내외삼촌도 병중이시다. 또 코가 맹맹해지려고 했다. 마음 속으로만 지낸 혼자 제사에 음복(飮福)한 막걸리가 과했나보다.
"무슨 얘기요? 아빠..."
전투가 끝났나보다.
"끝났냐? 응...아빠 외갓집...그러니까 니 할머니 ...."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무렵부터 선친은 집안 얘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어떤 때는 족보까지 꺼내 펼치셨다. 당신과 진중하게 나눴던 아니 일방적으로 들려주셨던 얘기의 상당부분은 그런 것이었다. 부자간에 그래도 조금은 살갑고 농섞인 대화를 나눈 것이라고는 당신이 투병하던 일년 반 기간에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때 이미 선친은 늙고 병드셨고 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들에게 짖꿎은 장난은 잘 걸지만 자칫 고리타분하게 들릴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끔 이런 류의 얘기를 꺼내면 녀석이 알던 얘기가 섞이는 걸 보면 이전에 토막내서 띄엄띄엄 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나의 외갓집 집안 내력과 어르신들 얘기를 들려줬다. 본관을 얘기하면 녀석이 이내 검색을 해서 질문을 했다. 한참동안 내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었고 그 분들 한분 한분께 받았던 사랑과 소소한 일화를 들려줬다. 그리고 오늘이 누구의 기일인지를 말해줬다. 녀석은 아빠의 롤모델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