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가 유난히 컸다. 역마살이 꼈는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자리에서 훌훌 벗고 나선다. 해상 날씨가 변덕이 심해 배편이 유동적이다. 홍도나 흑산도를 염두에 뒀었는데 미뤄야겠다. 이러다 여름 성수기가 걸리면 가을이다. 차라리 겨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한산할테니까.
산 중으로 숨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자연휴양림을 뒤적거린다. 시국이 시국이라 숙소의 절반도 개방하지 않는다.
부산과 제주 비행기 삯이 10,000원도 안된다. 제주로 마음을 정하니 자정을 넘긴 새벽 1시다. 새벽 6시 항공편은 6,500원 , 6시 25분 출발은 7,300원이다. 대범하게 800원 더 썼다. 제주 승객 모시러 가는 편에 태워가려는 것일까. 마음이 어떻게 나부낄지 나도 모르니 편도만 예약했다. 좌석을 지정하려면 3,000 ~11,000원이 더 부가된다. 평소 같으면 클릭했을텐데 왠지 비싸게 느껴진다. 어차피 1시간 남짓이다. 복불복 운에 맡긴다.
어디로 흘러가든 차가 있어야겠다. 차 렌트 예약을 했다. 혼자 다닐 테니 쿠페인들 상관없다. 모닝 어반 1,000cc경차다. 2020년 비교적 신차로 정했다. 집과 회사 왕복 택시비로 빌린다. 국내에서 제주가 렌트비가 가장 저렴하다.
주섬주섬 책과 여벌 옷가지와 속옷까지 챙기니 2시다. 간단한 세면도구, 접이 우산, 충전기가 상비된 백팩은 언제나 출동 태세다. 자는 둥 마는 둥 4시30분이 됐다. 도둑 샤워를 하고 바람 새듯 집을 빠져 나온다.
공항에 도착하니 5시 20분이다. 아뿔싸 세상은 넓고 똑똑하고 알뜰한 사람들은 많다. 대기줄이 곱창처럼 꾸불대며 길게 늘어서 있다. 가족, 연인 아쉬운 대로 애완견을 동반한 승객도 있다.
내 좌석은 2D. 가장 앞좌석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좌석이다. 사전에 지정했으면 +11,000 옵션 항목이다. 운이 좋다. 세 좌석중 통로측인데 출발할때까지 두 좌석이 그대로 비어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가운데 좌석으로 옮겼다. 그제사 졸음이 몰려온다. 나는 비행기를 타면 수면제가 따로 필요없다. 독일까지 단 한번 깬 적도 있다. 그것도 소변이 마려워서였다. 융프라우에서 신라면 면발을 물고 그대로 엎드려 잠들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이륙과 동시에 잠이 들었다가 랜딩하는 충격에 깼다.
7시30분 제주 땅을 밟는다. 제주는 맑다. 몇 번째일까. 족히 열 번은 넘었을 것이다. 웬만큼 알려진 곳은 다녀본 것 같다. 하루 한두 곳 기억에 남은 장소, 가보고 싶은 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참이다.
스마트폰을 해제하자 렌트 안내사항이 뜬다. 5번 게이트를 나와 5번 구역의 5번 주차장. 555 잠이 덜 깬 머리로도 잊어버리기 힘들겠다.
렌트 개시 시간은 8시다. 주일 이른 출근을 한 직원은 여러 고객에게 한번에 공통된 계약 사항과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한번만 말씀드릴테니 잘 들으세요” 5일장 약장수같다. (자~ 자~ 단 한번의 기회,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업쓰~~)
차는 주행거리를 20,000 Km를 조금 넘겼다. 차 외관을 꼼꼼히 찍어 둔다. 기름은 직원이 일러준대로 약 75%다. 계약서에 “추가 주유된 주유비는 환불이 어렵습니다.”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부족 시 청구비용은 도내 유가보다 높음)이 따라 붙는다. 피식 웃음이 샌다. 왜 렌터카 연료는 채우기 쉽게 만땅(100%)이 아닌지 알겠다. 이건 세계 공통인것 같다.
출출하다. 아침을 먹어야겠다. 아침은 각재기국이 제격이다. 생선국에 거부감만 없다면 개운하게 아침을 시작하게 한다. 6 Km 거리다.
아침인데 아직 9시도 안됐는데 대기번호가 14번이다. 한참을 기다린다. 15번이 먼저 호출된다. 다섯사람이 일행이다. “한 분이시죠. 좌석이 좀 그래서…” ‘뭐가 그렇다는 거지? 4인 테이블에 5명이 더 억지스럽지. 코로나 시국에…’ 불쑥 튀어나오려는 말을 도로 삼킨다. 아침이다. 제주에서의 첫 끼다.
이윽고 나를 부른다. 2인석이다. ‘당신들은 다 계획이 있구나’ 복수하듯 되도록 천천히 음미하며 배추잎 하나 안남기고 먹는다.
배를 채우고 나서야 오늘 밤은 어디에서 묵을까 궁리를 한다. 아무래도 게스트 하우스는 번잡스럽겠다. 싼 값으로 당일 땡처리 호텔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
평생 유일하게 가져 본 게 E리조트 회원권이다. 오래전 나의 주도로 동생들과 돈을 합쳐 구입했다. 전국에 3군데 밖에 없다. 오랫동안 구닥다리 조그만 브라운관 TV를 바꾸지않던 고집스런 회장의 철학이 좋아서, 경관을 거스리지 않고 베란다에 구멍을 내서라도 소나무를 살린 건축이 맘에 들어서, 회원을 회원으로 대접하겠노라는 운영방침을 믿을 수 있어서였다. 그 믿음은 아직 배신당한 적이 없다.
“몇 일 날로 예약해드릴까요?” “오늘요”
롸잇 나우(Right Now)인데 바로 방을 내준다. 나는 무도한 회원이자 충성스런 매니아다.
이제 당을 채울 카페를 찾아나섰다. 콘센트도 있어야하고 눈치도 보지 않아야 한다. 꾸벅꾸벅 졸면서 책도 봐야 하고 흠칫 깨면 손님대신 바다가 펼쳐져 있으면 좋겠다. 일렁거리지 않는 요트에서의 한가로움을 느끼고 싶다. 목적지까지 17 Km다. 제주에서는 제법 먼 거리다.
포구에 자리잡은 카페는 목적에 맞춰 지은 3층 건물이다. 카라멜 마키야또를 주문하고 잽싸게 아래 위층을 훑는다. 2층에 경관도 테이블도 마음에 드는 자리가 있다. 가방으로 찜을 하고 주문한 것을 받아 온다. 오늘은 이곳에서 제법 긴 시간을 보낼 참이다.
그러고보니 비행기 삯보다 비싼 아침을 먹고 업그레이드 비용을 아껴 카라멜 마끼야또를 주문하는 호사를 누린다.
카페 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민간인 최초의 우주여행 뉴스를 들었다. 미국의 억만장자 버진 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회장과 아마존의 베이조스 회장이 우주여행에 무보험으로 탑승한다고 한다. 째째한 사람들이다. 나는 렌트회사가 든 종합보험 외에 완전 면책 보험까지 과감하게 질렀다.
게다가 그들은 컴컴한 우주에서 파우치에 담긴 우주식량을 뜯으며 매표소 창구같은 작은 창으로 골프공 만한 지구를 내려다 볼 것이다. 나는 지금 달달한 아이스 카라멜 마키야또를 마시며 주체하기 힘들만큼 쏟아지는 햇볕을 받으며 (게다가 에어컨은 빵빵하다) 커다란 창가에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있다.
스케일이 다르다. 스케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