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 번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SNS를 뒤적거린다. 내가 들락거리는 이 곳은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다.
사람을 만나고 얘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지만 실은 이 곳은 말 그대로 비어있는 공간(space)에 불과하다. 만질 수도, 실존하지도 않는 가상현실의 세계다. 수경같은 걸 쓰고서 허공에 손발을 허우적대는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실상 그 세계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SNS를 닫거나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는 단순한 동작만으로 그 세계는 문을 닫는다. 마치 수경을 벗는 순간처럼...
그런데‘사이버 스페이스’란 말은 익히 들어왔지만 ‘사이버 플레이스(Cyber Place)’란 말은 쓰지 않는다.
우리는 흔하게 공간과 장소를 혼동해서 쓰고 있지만 엄연히 다르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리학자 이푸투한은 공간과 장소를 이렇게 구분했다.
”공간은 아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빈 여백과 같은 곳으로, 우리의 삶이 스며들면 장소로 발전합니다. 또한 공간은 생존의 조건이자 부과 권력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장소는 고유한 정체성과 정서적 유대감, 친밀함이 축적된 애착의 대상이 됩니다. <공간과 장소 / 이-푸 투안>”
막연하고 추상적인 '공간’이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장소(place)'가 된다는 말이다. 사이버공간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은 이런 연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장소인 줄 착각하는 그 곳이 공간이란 걸 깨닫는 순간 놀이동산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당황하고 불안해 하는 것이다.
집 역시 공간이 될 수도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배산임수의 좋은 땅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더라도 집에만 들어서면 커튼부터 젖히고 하염없이 밖을 내다본다면 그 곳은 공간이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잘 꾸며진 아파트에서 새벽에 깨어나 혼자 있을 곳이 마땅히 없다면 역시 장소가 아닌 것이다.
감각적 경험이 없는 텅빈 공간인 사이버 스페이스와 거주가 아닌 부동산 가치로 매겨지는 아파트와 같은 현상을 또 다른 지리학자인 에드워드 렐프 교수는 '장소 상실(placelessness)'로 정의했다.
어디선가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그리고 일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화장실에 가서 와인을 마신다는 주부의 얘기를 들었다. 그녀는 장소를 만드려는 노력 중이다.
넓은 거실과 자기 방을 두고서 굳이 작은 텐트안에 들어가 꼬물거리는 아이도 집을 장소로 만들려는 것이다.
나는 화장실 딸린 안방을 자식들의 공부방으로 내어주고 부엌에 딸린 좁은 방을 쓰는 부부를 본 적이 있다.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장소상실'을 자초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업으로 하는 나는 주방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주부들을 이해한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자신의 존재로 살아 숨쉬는 그들만의 장소란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간다. 그동안 시간에 밀려 소홀하게 다뤄졌던 공간에 대한 문화적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정년을 맞았거나 노후생활의 기반을 닦아놓은 중장년의 남자들이 빠지는 몇가지 취미가 있다. 사진이나 오디오가 대표적이다.
사진은 시간을 잡아 두고, 오디오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동안 무심히 흘려버린 시간의 흔적, 머물고 있는 시간을 사진으로 붙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껏 공간에 불과했던 곳을 음악 감상이라는 행위를 통해 장소로 만들려는 것이다.
여분의 방이 생기면 남자들을 서재를 만들고 책을 사들이고 채운다. 여자들은 그동안 손을 놓았던 붓을 들거나 피아노를 옮겨 작업실로 꾸미고 싶어한다. 자신만의 의미와 경험이 배여드는 장소를 원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오래전 친한 동생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방이 세 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안방과 딸을 위한 방 그리고 나머지 방 하나는 책과 짐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내 눈에 들어 온 건 거실로 난 큰 창에 붙여 밖을 내다보게 배치한 긴 책상과 거실 가운데 놓인 하얀 3인용 쇼파와는 어울리지 않는 오토만이 딸린1인용 의자였다. 연구가 업이고 책이 가까이 하니 긴 책상은 이해가 됐는데 쇼파의 흰 컬러는 의외였다. 역시나 아내의 취향이라고 했다.
“저건 니가 산거지?” 내가 1인용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형. 이거 중고로 벼르고 벼르다 사서 한국으로 들고 왔어요.”
“내 그럴 줄 알았다. 잘했다.”
그 의자가 찰스·레이 임스 부부가 디자인한 그 유명한 임스 라운지 체어다. 1956년 처음 출시되었다는데 지금까지 꾸준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 명품의자다.
한때 대통령이 되기 전 문재인후보의 사진에 등장해 구설에 오른 의자기도 하다. 지금도 700만원대의 고가 가구인데 문재인 대통령은 모델하우스에서 쓰이던 중고를 50만원에 구입했다고 했다.
비스듬히 누운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거나 졸 수 있는 의자는 남자에게 공간을 의미있는 장소로 탈바꿈시키는 중요한 소품이 된다.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시대를 연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애용하는 1인용 쇼파만큼은 이사할 때마다 챙겨서 다녔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느끼는 장소상실의 우울증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소설 <스토너>의 스토너 교수가 침대 옆 벽에 기대어 책장을 넘기다 죽음을 맞이한 것은 스티브 잡스의 그런 의자가 집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내겐 동생의 임스 라운지 체어도 스티브 잡스의 르 꼬르뷔지에가 디자인한 1인 가죽쇼파도 없다. 하기야 집이든 사무실이든 그만한 덩치의 의자를 들여놓을 공간도 없는게 현실이다.
그나마 10년동안 쓰고있는 내 사무실 의자는 큰 맘 먹고 산 제품이긴 하다.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디자인하고 국내 의자전문업체가 만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가지고 다닐 의자만큼은 좋은 것을 쓰고 싶었다. 실용성과 기능으로 선택한 제품이라 회장님 의자 같지도, 폼이 나지도 않는다. 사무실 내방을 다녀간 누구도 의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큰 불만은 없는데 단점이라면 방석이 길게 나와있어 엉덩이를 등받이에 깊숙히 집어넣고 허리를 곧추세우면 무릎이 접히는 안쪽을 눌러서 배겼다. 외국인이 디자인을 해서 신체치수를 서양인에 맞춰 설계했나보다 생각하고 지냈다.
오늘에서야 의자 방석 밑을 유심히 들여다 봤다. 방석이 유난히 앞으로 밀려 나와있어 등받이와의 사이가 떠 있는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방석 밑에 홈 두 줄이 파여있는게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방석도 움직이는게 아닐까?’ 예전에 발견하고도 그 이유를 몰랐던 네모난 버튼을 누르며 방석을 등받이 쪽으로 힘을 주니 부드럽게 밀린다. 근 10년동안 이 기능을 모르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지냈던 것이다. 훨씬 편하고 나아졌다.
‘이 의자처럼 내게도 숨겨진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은 발견하지 못한 버튼처럼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누군가에게 최적화된 편안한 의자가 되어 공간을 장소를 바꿔주는 상상을 해봤다. 잠시나마 '장소상실'과 맞서 싸우는 '아이언 맨'이 될 수 있어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