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부산

by 문성훈

11시. 부산역에 내렸다. 약속은 오후 5시 30분이니 충분히 넉넉하게 도착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는 내게 아내는 웃으면서 "잘 다녀와. 부산갔다고 굳이 어묵같은 거 사서 보내거나 안해도 돼"라고 했다. 내가 집을 떠났다 돌아오며 늘 빈 손인 게 아쉬웠나보다. 역 가게에서 어묵 셋트 택배를 부탁했다.

11시 30분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르지만 인근 돼지국밥집에서 해결을 했다. 가 볼 데가 있다. 그리고 약속장소 부근으로 이동해서 카페에서 기다릴 예정이다. 지척이 초량동이다. 내가 10대의 끄트머리 1년을 보낸 곳이다. 그리고...

부산출신의 가수들이 제법 있다. 그런데 내 머리속에 퍼뜩 떠오르는 이름은 언제나 최백호다.
불후의 명곡 '낭만에 대하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37년만이다. 숱하게 부산을 드나들고 묵었어도 그 시절 이후 한번도 밟지않은 길을 돌아볼 것이다. 나의 10대 마지막에 피어올라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사그라든 아릿한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어서...
초량에서 재수를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도 재수하는 게 죄송해서 숨어든 데가 부산 이모집이었다. 재수가 운명이 된 것도, 젊은 날 비만 내리면 울었던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강산이 세번 변하고 네번째 변하려는데 옛 기억만으로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처음 온 것처럼 낯설고 주변은 너무 많이 바뀌었다.
어젯밤 검색을 통해 이미 사라진 옛학원 주소를 알아뒀었지만 그 건물마저 사라지고, 지금은 부산출신 국회의장의 기념관이 새롭게 들어서있다. 지나치길 두어번 하다가 주소지 인근 건물에 들어가 묻고서야 알았다. 장소가 허물어지면 기억도 색이 바래는지 생경하기만 하다. 등어리엔 땀이 배는데 가슴으로 바람이 지난다.

그녀를 바래다주며 걷던 길을 더듬더듬 걸어간다. 내가 밟는 길이 예전의 그 길이었는지 자신이 없다.
그녀의 집은 이미 아주 오래전 없어졌을 것이다. 가느다란 희망이라면 그녀의 집 건물을 어렴풋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과 삼각지모양의 교차로 꼭지점에 있었다는 것 뿐이다.
그래도 길은 예전과 같을테니 지도를 켜서 비슷한 입지를 찾아본다. 두 군데가 비숫한 입지인데 한 곳이 유력하다. 이제는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서 더욱 헤매게 만든다.

옛 기억을 소환해서 걷는다. 주변 건물 중에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없다.
전부 바뀌고 새로 지어져 그럴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온 신경을 그녀에게 집중됐을테니 설사 40년전 건물이나 가게가 남아있더라도 몰라봤을 것이다.
이윽고 내 기억 속 건물 형태와 길이 일치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이 건물이었던가. 맞다면 3층이 그녀의 집이고, 저 창문이 그녀의 창이었다. 멀리서나마 뵙던 1층을 지키던 그녀의 부모님은 늘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심연에서 뭉글뭉글 부유물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그래도 확신은 할 수 없다. 좁은 골목 안 허름하고 낡은 식당 앞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선풍기를 고치고 계신 게 눈에 띈다.
"안녕하세요.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오랜 전 ㅇㅇㅇㅇ건물이 어딜까요?"
"ㅇㅇㅇㅇ요? 저거 편의점 있는 저 건물 저건데"
운좋게 맞게 찾아왔다. 아마 두세차례 주인이 바뀌었을 것이다.
걸어왔던 길을 주억거리며 다시 쳐다본다.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걷던 흰 브라우스 청치마의 소녀와 자그만한 그녀에게만 눈길을 주던 유쾌한 소년이 걸어오는 것만 같다.

다시 걷는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나 다른 여인과 결혼식을 치른 장소로 찾아가는 길이다.
나는 부산일보사 사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건물 역시 그리 멀지 않다. 강당이었을 그 층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딱히 인연도 없는 그 건물에서 결혼식을 치른 것은 내 고집 때문이었다. 무료식장에서 하고싶다는 내 바램대로 아내가 물색한 장소였다. 당시 내가 1인당 얼마 이상의 식사비는 과용이라고 우겨서 정했던 부근의 갈비탕집은 보이질 않는다.
그러고보니 첫사랑 그녀의 집과 불과 100여미터 떨어진 건물에서 지금의 아내와 결혼식을 올린 셈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묘한 기분이 든다. 사람의 인연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 나는 함부로 단정할 수도, 예측할 수도 그 무엇에 이끌려 지금껏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내 지나온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희미해진 흔적을 매만지며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아쉬워한다. 새삼 이 나이에.....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로 간다. 라디오에서 음악을 흘러나온다. 이건 무슨 우연일까.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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