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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Nov 06. 2021

계단을 부술 밖에...

말을 삼킬 줄 모르면 말이 사람을 삼키기도 한다.
최근 들어 빈번해진 현상이다. 물론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누구나 이런 위험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처럼 배움이 짧거나 성정이 그릇된 사람이 아니라 인텔리나 말로 먹고 사는 직업, 예컨대 정치인이나 기자에게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일반인보다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람들의 말 사고는 개인과 조직을 넘어 사회에까지 심각한 폐해를 끼친다. 더욱이 그들의 잘못된 권위의식과 지적 오만은 반성과 사과보다는 변명과 왜곡으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곤 한다. 말로써 말을 덮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말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려운듯 쉽기도 하다.
대체로 짧은 소견으로 쉽게 뱉는 말은 상대를 오해하게 만들지만, 깊은 사유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어렵게 꺼내더라도 상대를 쉽게 허물어뜨린다.
그런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인데도 통역 없이는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이 통역은 대개 왜곡되어 있거나 궤변이다. 같은 우리말을 쓰면서도 통역이 필요한 사회는 결코 건전할 수가 없다.
불통과 거짓이 횡행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서울살이가 어언 36년째다. 고향보다 서울에서 훨씬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아직도 내 말에는 사투리 억양이 묻어 있다. 젊은 날 사회 생활에서 이 문제를 고심했던 적이 있었다. 공식석상에서 다중을 상대로 말을 해야 경우였다.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느리게도 해봤다가 단문으로 끊어서 하기도 했다.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오는 사투리 때문에 부당한 평가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디자이너라는 직업과 사투리는 갓을 쓴 테너가 부르는 이태리 가곡같았다.
당시 유용하게 써먹던 방법이 있었는데 영어와 전문 용어를 쓰는 것이었다. 지금은 일부러라도 쉽게 풀어 쓰지만 그때는 시쳇말로 있어보이는 그럴듯한 묘안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일반인과 전문가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이나 바리케이트 역할이었던 셈이다. 일상생활에서는 개의치 않는 사투리였지만 의사 소통에 있어 분명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사투리에 고민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 요즘 젊은 세대의 언어습관은 특이한 양상을 띤다.
힙합가수들이 즐겨 쓰는 용어와 젊은이들의 신조어는 당혹스럽다. 마치 우리 세계에 건너오지 말라는 신호음처럼 들린다. 세대 차이를 분명히 구분짓고자 하는 무의식의 발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 이런 우려가 사실이라면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고 우리 사회의 또다른 걸림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다루는 공간에도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다.  하나의 텅 빈 공간에도 걸림돌은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기둥과 턱이다. 구조적으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기둥은 턱에 비해 해결하기 수월하다.오히려 부각시킨다는지 디자인 오브제로 활용하기 쉬운데 턱은 까탈스러운 존재다.

턱을 평탄하게 깎을 수 있다면 수월하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다.
게다가 너무 낮아도, 높아도 문제다. 가령 5cm미만이거나 20cm이상일 때 그렇다. 낮으면 발에 걸려 넘어지기 쉽고, 높으면 오르내리기 어렵다.
이것은 주로 계단 높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오르내리는 계단의 높이는 16~17cm다. 노약자를 배려한다면 14~15cm다. 인테리어에서는1cm가 그만큼 중요하다. 슬로프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계륵이다. 경사진 면적이 넓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계단 하나를 만들면 29~30cm의 바닥판이 계단폭만큼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정작 디자인적으로 풀기 어려운 숙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의 분절 현상이다.
한 바닥에 턱이 진 공간이 있다는 것은 연결과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평면계획상 용도나 사용자에 따라 공간을 나뉘는 분기점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또한 매끄럽고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편안하게 넘나들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턱이 많다.
출신지역과 배경, 성별, 학력, 재산, 지위 심지어 거주지역이라는 턱까지 존재한다. 어디 그뿐인가 드러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언어습관, 사상과 이념, 정치적 성향, 의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턱이 우리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이제 개천의 용은 설화나 동화 속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사다리보다는 적당한 물매의 계단이 놓여지는 세상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이 세상 속의 턱이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바리게이트가 되어서는 안된다.

세상은 우리 모두 앞에 펼쳐진 시공간이고, 우리가 디자인한다. 높은 턱은 정치와 제도로써 계단을 놔야 한다. 낮은 턱은 사고의 면적을 확장해서 슬로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쉽게 다가가고, 편안하게 서로의 영역을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함께 걷는 길에 걸림돌을 치우는 작업이고 바람직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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