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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Nov 06. 2021

별거 아닌 별거... 인테리어 2

주택 인테리어에서 소유와 주거를 구분 지어야 한다면서 전월세인 경우 가구나 소품등 고정되지 않은 요소들에 더 가치를 두고 공간의 효율적 활용과 만족도에 주목하라는 말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마치 비싸지만 오래 간직하고 쓸 물건을 구입하라거나, 만족스런 공간 연출을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고 충동질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오피스텔 월세를 살아도 포르쉐를 모는 카퓨어족을 연상시키고 사람들 이목이 신경쓰여서라도 명품백 하나 정도는 구비해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아니다. 포르쉐나 명품백은 실은 유한(有閑)계급의 과시적 소비를 위한 수집품이다. 즉 부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과시하기 위한 소비행태인 것이다.
몇 억짜리 할부차를 굴리는 카푸어족이나 자신의 연봉에 해당하는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오피스걸은 이런 부자들을 추종하고 모방하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안쓰러운 몸부림에 불과하다. 오히려 정신마저 더 남루해 보이는 것이다.

내가 얘기하는 가치 투자는 오롯이 스스로의 평가에 따른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큰 결심을 하고 구입한 비싼 가죽 쇼파와 대리석 식탁이라도 부자들은 수십개를 살 수 있다. 물론 구입 비용보다 더 큰 만족을 느낀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같은 액수라도 서민과 부자가 실제 느끼는 화폐의 가치는 이미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세입자의 500만원 짜리 소파가 빌딩주에게는 50만원짜리일 것이다. 포르쉐를 모는 카푸어족이 허술한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불안한 채 잠들 때 실제 부자는 차고에 그런 포르쉐를 컬러별로 보관해두고 있을 것이다.

나만의 것, 나만이 진정한 가치를 알고 그 자리가 아니면 어디에 두어도 빛날 수 없는 ‘무엇’에 주저없이 투자하라는 것이다.
우리집에는 오랫동안 쓰고 있는 식탁이 있다. 여느 집에서 쓰는 식탁과는 크기나 형태가 다르다. 오래전 주택 인테리어를 하면서 원목 문짝을 주문제작하게 됐다. 혹시 불량품이 있을까봐 여분으로 한 짝을 더 만들었다. 다행히 여분의 문짝이 필요없게 됐다. 그 문짝이 식탁 상판이 됐다. 프레임은 문짝 사이즈에 맞춰 스케치로 그려 주문해서 조립한 제품이다. 상당히 크고 튼튼한데 식탁이 되었다가 가족의 작업테이블이나 책상으로도 쓰인다.

굳이 이렇게 주문 제작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누구에게나 이왕이면 이야기가 있고 유일무이한 제품을 구입하기를 권한다. 이또한 희귀한 골통품이나 한정품을 사라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제 막 결혼한 젊은 부부가 있다. 바닷가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해거름 노을이 아름답던 날 신랑이 앞으로 두 사람이 펼쳐 갈 삶을 그린듯 속삭인다. 당시에 두 사람이 앉아있던 란탄 의자를 호텔 매니저에게 사정해 구입했다.
이 란탄 의자에는 두 사람만의 절실한 사랑과 충만한 삶의 의욕이 담긴 의자다. 귓전에 울리던 파도 소리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그 날의 아름다운 노을 빛을 간직한 세상 유일한 의자다.

하루하루를 힘겹고 바쁘게 살던 부부가 있었다. 행운처럼 부부동반으로 처음 외국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유럽 어느 거리를 걷다가 한 가게에서 어느 가정에서 쓰던 낡은 갓등 스탠드를 보게 됐다. 아내는 무척 마음에 들어하지만 빠듯한 여비에 쉽사리 살 엄두가 나지 않는 액수였다. 그 순간 남편이 그동안 박한 용돈을 모은 비상금을 털어 그 스탠드등을 사준다.
이 스탠등은 이제 지난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지만 상상할 수 있게 하고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담기 시작한다. 아마 두 사람의 사랑이 변치 않는 한 그 스탠드 등은 부부침실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선물로 받게 되거나 화원에서 살 수 있는 화초는 많다. 간혹 짐이 되기도 한다. 아파트 화단에 누군가가 이사가며 버리고 간 고무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다. 이제 막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그 나무를 주워와서 이쁜 화분으로 옷을 입히고 매일 정성껏 돌본다. 볼 때마다 걱정과 안부를 묻고 사랑 고백을 한다.
노래를 불러주며 물을 주던 어느날 고무나무는 병석을 털고 일어난 환자처럼 기력을 되찾고 새 잎을 틔운다. 그 고무나무는 이제 세상에 흔하디 흔한 고무나무가 아니다.

그런데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간혹 이렇게 구입한 물건이라도 바꾸거나 버릴 때가 있다. 용도가 다했고 헤졌다는 다행이지만 당시에는 구매충동이 일어날 만큼 매혹적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감동이 줄어들고 가치가 없어 보여서라면 곤란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별로라서 애정이 시들해졌을 수도 있고, 또 하나는 물건 자체가 그만한 가치나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했는데 당시의 판단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
전자는 언급할 필요가 없고 후자는 안목의 문제다.

여기서의 안목은 디자인 감수성에 관한 문제다. 탁월한 디자인 감수성은 감각이기도 해서 타고나기도 한다지만 학습과 노력으로 향상되기도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두 타입이다. 드레스 룸에 옷이 무진장 넘쳐나는 사람이거나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나는 사람이다.
전자는 돈이 많이 든다. 여러 벌을 사서 입어보고 선택할 수 있고 악세서리와 맞추느라 거울 앞을 떠나지 않는다. 후자는 일부러라도 많이 걷고 식단 조절을 해서 몸을 명품으로 만들고 지나치는 사람의 복장까지도 유심히 관찰하는 사람이다.

나는 디자이너로서 후자를 권한다.
전자는 기후변화와 환경파괴가 화두에 오르는 시대의 조류에도 맞지 않다. 후자인 사람은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기도 하다. 앞에 있는 사람의 옷을 자신이 바로 입어보는 사람이다. 사람의 뇌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휴일 지나간 드라마를 몰아서 보느라 TV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보다 경복궁 근처 갤러리를 찾는 사람, 홈쇼핑으로 쉽게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보다 황학동 거리를 배회라는 걸 즐기는 사람, 커피 한잔을 마셔도 프랜차이즈보다 주인의 디자인 감각이 돋보이는 인테리어가 된 조그만 커피숍을 찾는 사람이 그런 유형이다.

나는 자주 디자인이 세상을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든다고 말한다. 디자인은 이런 식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이야기와 디자인이 공존하는 공간이 바로 장소가 되는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무엇.
우리 모두가 아이언맨의 스타크회장이 될 수도 없지만 될 필요도 없다. 스타크 주택의 화려한 인테리어와 가구 그리고 아이언맨 슈트. 글쎄 디자인적으로 나는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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