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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Nov 30. 2021

그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아빠 밖에 잠깐 나와보세요”
그 일은 지난 일요일 딸아아가 아침을 깨우면서 시작됐다. 거실에 놓인 낮은장 쪽 마루 일부가 젖어 있었다.
원래부터 낮은 장은 난방 분배기를 둘러씌우는 용도였기에 문을 열어봤다. 아니나다를까 분배기 이음매에서 미세하게 물이 새고 있었다. 장 안쪽 노출된 시멘드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있다.

어차피 닥칠 일은 좀더 일찍 아니면 조금 더디게 올 뿐이다.
이미 조짐은 작년부터 있었다. 용케도 1년을 더 버틴 것이다. 그때도 증상이 나타났을 때 노후된 분배기를 교체해야 한다고 했었다. 비용도 만만찮은데다 이 대신 잇몸이라고 각방 온도조절기를 쓰지 않고 수동 밸브조작으로 어찌어찌 지냈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리 수월해 보이지 않았다. 일요일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연락해 수선을 피울만큼 그리 다급한 상황도 아닐 뿐더러 할 수 있는 조치라는 것이 휴일 병원 응급실을 찾는 것과 매한가지일 거란 생각에 내가 팔을 걷어 부쳤다.
일단 물이 새는 부위가 한두군데가 아니다. 아파트가 지어질 당시의 워낙 노후된 분배기라서 전반적으로 삭아서 그렇다. 응급조치로 새는 물을 한군데로 모으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다가 모세관 현상을 이용해 끈으로 그릇에 담길 수 있게 해 뒀다.

월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관리사무실 소개로 인근 업체에서 사람이 왔다.
이미 작년에 들었던 얘기지만 이번에는 비용과 일정까지 알아봤다. 최종적인 결정은 오후에 연락하겠노라하고 돌려보냈다.
명색이 건축을 전공하고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이럴 때는 속수무책이다. 백만원이 훨씬 넘는 금액인데 자재를 구입해서 직접 교체를 해볼까 아니면 우리 협력업체에게 시킬까 마음이 심란해졌다.
직접 시도하기에는 엄두가 나지않고 내 집 일로 협력업체를 찾기에는 왠지 부담스럽다. 그래도 받은 견적이 있으니 비용이라도 알아보는 셈치고 협력업체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내 집이라고는 하지 않고 개략적인 비용만 물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인근업체의 절반 정도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런데 아파트마다 다른 사양이라 기성제품이 있는지 알아봐야하고, 작업 일정도 며칠정도 기다려야 한다. 아마 내 집이라고 했으면 좀 더 낮은 가격에 일정도 더 앞당길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했다.

결정을 하고 월요일 오후 늦게 최초 다녀간 인근업체에게 공사를 의뢰했다.
그들로서는 이미 손에 익은 작업이어서 안정성이 담보되고 다음날 바로 시공이 가능하다는 이유가 컸다. 우리 협력업체가 사진 한 장으로 판단하기에는 비용산출에 증감이 클 가능성이 높고, 익히 해왔던 작업도 아니어서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도 신경쓰였다.
무엇보다 인근업체 사장에게 신뢰가 갔다. 같이 왔던 사람은 상태를 보자마자 전체를 갈아야 한다며 손쓸 궁리를 안하는데 그는 낮은 장을 들어내고 어떻게든 새는 물방울을 임시로라도 잡아주려 했었다. 결론적으로 메인 밸브가 잠기지 않아 본격적인 교체작업 없이는 조치를 할 수 없었지만 그가 보여준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 화요일 아침 일찍부터 작업이 시작됐다.
친구사이인 듯한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았다. 직접 해보지는 않았어도 그동안 수없이 많은 비슷한 작업을 지켜본 내 경험에 비춰봐도 흡족한 수준이었다.
더구나 분배기는 주문제작한 것이었다. 기성제품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협력업체에 맡겼을 때 우려가 됐던 부분이다.
“말띠시던데 저하고 동갑이시더라구요” 어떻게 알았는지 내 나이를 알고 있었다. 작업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갔다. 그는 낚시가 취미라고 했다. 같이 온 동료는 한살 아래였지만 친구처럼 무관하게 지내는 듯했다.  
그 동료가 퉁을 줬다. “아이구 말도 마세요. 이 양반이 예전에는 새벽까지 말 술이었는데 이젠 술도 안마시고, 보루로 사서 하루 네 갑씩 피우던 담배도 끊고 낚시만 다녀서 이젠 제가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낚시가 좋으세요?” 내 물음에 그는 작업하던 손길을 늦추지 않고 낚시얘기를 노동요처럼 풀어놓는다. 이런 작업에 다반사로 있기 마련인 변수들을 말끔하게 처리하는 품이 믿음직스러웠다.
그의 동료에게 어디선가 작업 요청 전화가 걸려왔다. “그 날은 안되는데….. 낚시 가야 돼” 그의 말에 동료는 일정을 조정했다.
그들이 사양하는 바람에 나까지 점심을 거르고 오후3시가 다 되어서야 작업이 끝났다.
점심까지 거른 것이 마음에 걸려 내가 뒷정리를 하겠노라 하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청소까지 마치고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식사를 하고 난 후 커피 한잔을 뽑았다. 지난 이틀간 일어난 일을 되감았다.

소위 586의 정치실험은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깝다. 민주당이 이를 증명해줬다. 원인과 해석이 분분하겠지만 내 식으로 풀어보자면 이런 것이다.
나는 건축을 전공했고 지난 30년간 인테리어를 경험했다. 내 집에 내 일과 연관성 있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원인도 근본적인 수습방안도 알지만 내가 직접 하지 못한다. 이론과 원칙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내 손으로 처리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익히 잘 알고 손쉽게 맡길 수 있는 사람보다 낯설지만 능력이 검증되는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다행히 문제는 잘 수습됐고 그 과정에서 우려했던 사안이 실제 발생했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이론과 원칙만으로 해석하고 눈 앞의 손익만 따졌다면 어떤 결과를 빚었을까
혹은 젊은 날 짧게 경험했던 어설픈 솜씨를 과신해 직접 처리하려 했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
나는 단지 우연하게도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 판단과 선택마저 잘못됐다면 나는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선택한 사람들은 나보다 앞서 내가 도달하고 싶은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누구나 대중의 환심을 사려는 정치인들은 서민과 노동자 그리고 소외된 이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변화와 개혁을 앞세우는 정치인들조차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이 되어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순수하게 이해한 적도 없다. 입으로 원칙과 이론을 주창했을 뿐이고, 알량한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주도권이 주어졌지만 어느새 그들 스스로 그토록 비토했던 기득권이 되어있고, 기성 정치논리에 안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이 진보진영의 586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고, 그 한계 때문에 국민에게 외면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수십년간 봐왔던 작업이고 이론적으로는 더 잘 알지만 직접 처리할 수 없고 누군가의 힘을 빌어야 되며 내게는 그 누군가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과제만 남았던 상황과 흡사하다.

그런데 그들은 직접 경험이 일천한데도 만용을 부리며 나서다 실패를 거듭했고 판단과 선택마저 기성정치권의 방식을 안이하게 답습하는 것이다.
그들은 당장의 이해득실과 당파성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아무리 현장성을 강조하고 노동자들과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과 정서를 공유하는 노동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이 아무리 열렬하게 민주주의를 주창했고 일반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펼친다고는 하지만 실천적 민주주의에 천착한 적도, 진정한 의미의 일반서민이 되어 본 바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도구로 전락시켰고 서민을 건너뛰어 어느새 권력을 탐닉하는 또다른 기득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실천없는 이론가들을 신뢰하지 않으며 직접 보여준 바도 없는 그들의 솜씨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고달픈 민중의 삶으로 뼈마디가 굵어진 사람, 혈관 속에 개혁과 변화의 적혈구가 도는 사람을 원한다. 이미지와 허상의 거적데기로 흠결을 감추고 소수의 기득권이 그들의 탐욕을 위해 내세운 속 빈 허수아비가 아니라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온 저력과 가설건물이나 다를 바없는 후광이 아닌 실력과 성과로 자신을 입증한 인물을 선택하려는 것이다.
그에 의해서 이미 기성권력에 안주하는 그들의 잊혀졌던 순수성과 투지가 살아나고 더 나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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