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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un 16. 2022

참을 수 없는 화자의 가벼움

서가에 꽂힌 책 권수만큼  자신의 지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대문호의 탁월한 한 줄 문장만큼 흠잡히지 않을 명구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읽지 않는 책일망정 끼고 사는 것인지 모른다. 밑줄이라도 그어서 외우고, 누구에게라도 옮기려고 말이다.


“객관적인 눈으로 차분히 행하는 독서가 완벽한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가 핵심에 이르는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는 책의 깊은 광맥을 건드리지 못한다. 책에 담겨 있고 당신의 눈과 삶의 저변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반짝이는 진실의 핵을 건드리지 못한다.

당신의 눈 속, 삶의 저변, 즉 근원에 가 닿는 또 다른 독서만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당신 안에 자리한 책의 뿌리로 직접 가닿는 독서, 하나의 문장이 살 속 깊은 곳을 공략하는 독서. - 작은 파티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감탄을 자아내는 지적 내공과 경륜이 우러나는 문장이다.


그에 비하면 김훈은 더 신랄하고 거칠다.

“나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길을 본 적이 없다. 책 속에는 글자가 있다. 말의 구조물이 있는 거다. 지식은 있으나 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길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땅 위에 있는 거다.

나와 자식, 친구, 이웃 사이에 길이 있는 거다. 책 속에 길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길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있으나 마나다. 책 속에 있다는 길을 이 세상의 길로 끌어낼 수 있느냐, 내가 바뀔 수 있느냐가 문제다."


어디 그뿐인가. 김훈은 거기에 더해 우리의 오독과 무지에 죽비를 내리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혹시 말을 잘못 알아듣고 김훈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쓰는 사람은, 정말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우두둑... 목과 척추를 비트는 안마의 개운함이 이런 것이다. 나는 통증을 유발하는 쇠꼬쟁이로 속을 훑어내는듯한 말이 좋다. 오래 기억되고 깊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이낙연이 미국으로 떠나며 이런 말을 남겼다

"강물은 직진하진 않지만 먼 방향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휘어지고 굽이쳐도 바다로 가는 길을 스스로 찾고 끝내 바다에 이른다"

차라리 아무 말없이 떠나느니만 못하다. 강상에 배 띄우고 산천경개 유람 떠나는 낙향한 벼슬아치의 푸념같은 한시에 비할만 하다.


왜 그의 말은 아침햇살에 사라지는 새벽녘 물안개만도 못한 것일까?

고된 일과를 마치고 쓴 소주잔을 기울이는 노무자의 담배 연기는 구수하기라도한데 그가 내뿜는 뿌연 안개에선 역한 냄새가 난다.

혀끝만 놀리는 겉도는 말이라서다. 가슴과 심장에서 나온 진심이 아니라 온갖 것이 뒤섞여 썩고있는 복심에서 올라오는 구취때문이다.

이제 왠만한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미국행이 무엇을 뜻하는지, 미국 대학의 연구소가 왜 과제도 성과도 없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연구원을 받아들이는지 안다.

강물도 강물 나름이다. 온갖 오수처리장도 안거친 폐수가 바다에 흘러들어 좋을 게 뭐 있을까. 오염된 강은 큰물일 수록 바다를 더 더럽힐 뿐이다.


그에 비하면 배우 윤여정의 말은 심금을 울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직설적이고 솔직한데다 진심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이야. 서러움이 있지 왜 없어. 그런데 그 서러움은 내가 극복해야 하는 것 같아. 나는 내가 극복했어"

그의 서러움을 지켜봤고, 극복하는 과정에 박수를 보냈기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설사 누가 "너 잘났다"하더라도 "그래 나 잘났어" 대꾸할 것만 같은 당당함이 배여있다. 몸으로 보여줬고 속을 긁어내서 보여준 말이라서다.

 

"야생화는 사람들이 이름을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다.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알아주건 말건 늘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 이낙연"


"아쉽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지만 다 아프고 다 아쉬워. 하나씩 내려놓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해 난 웃고 살기로 했어 인생 한번 살아볼 만 해 진짜 재밌어. - 윤여정"

헌신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자의 비굴함과 하나씩 내려놓은 자의 홀가분함은 질적으로 다르다. 이낙연은 "이렇다"라고 하고 윤여정은 "난 이래"라고 한다.


세인의 평가와 인기를 먹고사는 정치인 이낙연과 배우 윤여정의 말에는 차이가 있다.

이낙연의 말은 뭉개지고 그럴듯하게 들린다. 윤여정의 말은 또렷하고 그렇다고 느껴진다.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윤여정의 음색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감동의 깊이와 여운의 길이가 다른 것은 나만의 선입견이고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윤여정의 말에는 '내'가 있고 이낙연의 말에는 '내'가 없는 것이다.


'나'는 뒷춤에 감추고 복심반 충동질반으로 내뱉는 말에는 아무런 무게도 느낄 수 없고 울림도 퍼지지 않는다. 사랑과 이별을 모르는 초등학생의 발라드나 6.25를 겪지않고 부르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도 그보다 낫다.

말 뿐인 말과 말하지 않아도 보여지는 말은 다르다. 그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안다. 미국까지 가서 연구하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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