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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11. 2022

도용과 표절

"내가 잡았어. 드디어 잡았다니까....."

전화를 받자마자 앞뒤 다 자르고 잡았다고만 하니 무슨 영문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한껏 들떠있는 그를 진정시키고 듣게 된 자초지종은 대략 이랬다. 식당을 오픈해서 밀려드는 손님으로 눈코 뜰새 없는데 며칠째 찾아오는 한 손님의 행동이 미심쩍었단다. 늘 자리를 바꿔 앉는데다 핸드폰으로 뭔가 찍어대는 품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날 유심히 지켜보다 그 장면을 포착해서 추궁해보니 프랜차이즈 본사 직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강남 최고 비싼 주상복합빌당 1층 상가에 프랜차이즈 베트남 식당을 오픈했다.

입지나 유동인구, 소비수준은 입증된 바라서 비교적 유리한 가맹 조건으로 본사가 선정한 인테리업체에게 매장 공사를 맡겼다.

그런데 디자인 시안이 흡족하지 않았다. 메뉴얼작업의 특성일 수도 있었고 업체의 역량이 따라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는 본사 대표와 단판을 지어 자신이 선정한 업체에게 매장 인테리어를 맡긴다는 양보를 이끌어냈다. 입지와 사업성을 참작한 프랜차이즈 본사와 그의 배짱과 안목이 이뤄낸 합의였다.


그의 느닷없는 전화를 받고 찾은 현장은 철거가 끝나고 일부 공정은 막 착수가 된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사를 맡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나의 오랜 지인이자 옛 직장 상사였다. 내게 의뢰하고 싶어 이전 공사 부분에 대한 대금결제까지 끝내고 본사와 예외적인 합의까지 이끌어냈다는데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몇가지 조건을 내세워 수락했다. 첫째는 디자인부터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해서 작업한다. 둘째는 필수 불가급한 사양외에는 본사 메뉴얼을 따르지 않는다. 셋째는 인테리어 전반에 있어 본사 팀의 감독과 검수를 받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매장 인테리어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오픈 첫날부터 전국 최고의 매출을 갱신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단이 난 것이었다. 인근 강남과 구로의 신규 매장 인테리어에 내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전직 판사 출신의 대형 로펌 변호사였다. 그는 다소 흥분된 기세로 소송까지 들먹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도 아닌데다 예상가능했던 일이기도 해서 차분했다.

"고정하시고...무슨 말씀인지 아는데 정식으로 항의하고 경고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시죠. 아시잖습니까 1년, 길게는 2~3년 끄는 민사 소송에 그리 득될 게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 건이 앞으로 있을 본사와의 협의나 조정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겁니다."


디자인 특히 인테리어 분야에서 디자인 도용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는 예술가가 아닌 디자이너의 숙명이기도 하다.

인테리어는 기획에서부터 완공까지 수많은 단계를 거친다. 공동작업이다보니 디자인 작업에서 얻게되는 노하우가 온전히 디자이너의 것이 되기 어렵다. 남의 손을 빌어 완성하니 재료나 기법 등 실행단계에서의 비밀을 보호받기란 애시당초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최초로 시도한 아이디어이고 오랜 고심 끝에 이뤄낸 성과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거대 담론 때문이 아니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결국 구현되고 공개될 때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일반인에게 정보가 되는 것이다. 도용의 경계선을 긋거나 제재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다.


나 역시 초기에는 디자인 도용에 무척 민감해했고 적잖이 분노했다. 항의하고 소송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결과는 늘 시원찮았다. 그 시간과 노력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구상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깨닫게 됐다.

결코 자조나 단념이 아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고 빼앗을래야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디자이너는 창작을 하는 작가라기보다 미적 감각을 지닌 기획자에 가깝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과 세상에 나와있는 재료를 활용해서 최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거기에 자신의 미적 감각, 신념, 기술적 이해, 과학적 수단을 동원해 다시 재생산할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을 창출해내는데 희열과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다행히 인테리어 디자인은 동등한 여건이 주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공간의 형태, 높이, 주변 환경, 작업 조건이나 의뢰인의 의도등 설사 메뉴얼이 있다해도 그 결과까지 같아지는 경우는 없다. 디자인의 어떤 부분, 오브제의 형태까지 그대로 가져다 쓰더라도 똑같은 공간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디자이너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최선의 가치로 삼아 끊임없이 탐구하고 해법을 찾는다.

사소한 디테일에도 의미와 이유가 있어 고집하는 사람이고, 쉽게 돌아가기 보다 직진하고 돌파하려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인 것이다.

시행착오에서 개선점을 찾고 반복되는 공통의 작업에서 최적의 경로를 찾아가는 패스파인더인 것이다.

늘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갈구하고 지나온 과정을 경험과 지혜로 축적해야 디자이너인 것이다.


오랜 시간과 고민으로 창출된  공간은 수많은 요소들이 어울려 다양한 느낌과 정서를 일으킨다. 배치와 형태, 컬러와 질감, 사소한 디테일과 소품 하나마다 제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누구, 어떤 경우라도 디자이너의 생각과 경험, 그의 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까지 도용할 수는 없다.


위조지폐가 범죄인 건 지폐의 완성도가 떨어져서가 아니다. 화폐로서의 가치를 인증받을 수 없어서다.

학력위조가 지탄받는 건 타인의 시간과 공력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논문표절은 학력위조가 지닌 양심과 도덕성의 결여 뿐만 아니라 위조지폐처럼 아무런 가치도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원작자의 시간과 노력, 학문적 성과를 무단으로 훔친 절도행위인 것이다.


벤치마킹이나 인용은 새롭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허락된 계단이다.

남의 디자인을 도용만 해서는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남의 논문을 표절해 받은 학위로 권위를 인정받을 수는 없다. 껍데기만 흉내낸 공간이나 텍스트만 베낀 논문에는 원작의 가치와 정신이 살아있을 수 없다.


위조지폐가 어둠의 세계에서 통용되듯 표절논문이 인정받는 사회는 병들어있다. 고름이 차도록 내버려두려는 측과 환부를 도려내려는 측의 논쟁이 치열하다.

우리 사회가 고열에 신음하는 중이다. 치유되는 과정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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