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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09. 2022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남한테 돈 꾸러 안가게 해줬고, 봉급에 손 안대고 그대로 가져다주셨다"

평생 함께했던 남편에게 가장 고마운 게 뭐냐는 질문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부티나게 크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이 궁핍하지는 않았다. 따로 용돈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신발장 위에 놓인 어머니 손지갑에서 꺼내 쓰게 하셨다.

두 분의 일관된 가르침이 있었는데 "아니다 싶으면 싸우고, 상대가 강하다고 기죽지 마라" 였다. 그나마 순화한 표현이고 원문은 "사내새끼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로 시작하는 살벌한 말씀을 어린 자식에게 서슴없이 하셨다.


그 탓인지 선친은 실력으로는 늘 최고라는 평판에도, 진작에 고과점수는 채웠는데도 교감 승진은 남보다 늦었다. 윗사람의 잘못을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앞뒤 재지않는 의협심으로 눈 밖에 난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늘 "니 아버지가 회사에 취직했더라면 진작에 쫒겨났을텐데 그나마 선생이 되길 천만다행이다"라고 하셨다.


그 피를 물려받은 나는 철밥통인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 좌충우돌 직장 생활에 에피소드가 많았고 내 사업을 하면서도 늘 별스럽다는 소리를 듣는다.


팔순이 넘은 회장의 저택을 작업하는데 어느날 젊은 회장 사모가 나를 호출했다. (회장은 본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했다. 그녀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인사다)

"도대체 그렇게 인테리어 해서 밥벌이나 하겠어?...." 앙칼지게 꾸짖었다. 살짝 눈 앞에 빈 화면이 나타나더니 손이 떨려 볼펜을 떨어뜨렸다.

폭발직전 옆자리에서 눈치를 보던 과장이 내 손목을 지긋이 힘줘서 잡았다. 그녀의 머리꼭지를 돌게 한 건은 거실 바닥에 원목마루를 깔겠다는 계획 때문이었다.


이태리 대리석을 깔라는 것이었다. 회장은 한차례 뇌경색이 와서 반신이 온전치 못했다. 늘 비서의 부축을 받았다. 그런데 바닥에 차갑고 딱딱하며 미끄러운 돌을 깔라고 하니 도저히 승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이유를 설명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굽히지 않자 사모는 더 기승을 부렸다. 다행히  그녀의 일정 때문에 평행선을 달리던 그날의 미팅은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었다.

방을 나서며 그녀는 오금을 박았다. "무조건 대리석으로 깔아요. 시키면 시킨대로 하면 되지...." 나는 인사는 커녕 대꾸도 안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녀의 요구대로 이태리산 대리석을 깔면 공사금액이 올라가니 회사도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내가 용납이 안됐다. 그녀의 예의없고 하대하는 말투도 거슬렸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계약서가 '갑'과 '을'로 표기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고?

나는 회장의 아들 즉 그 회사의 대표실로 찾아가 자초지종을 고변했다. '계모가 당신 아버지를 죽이려든다'는 뉘앙스로.....  

평소 말수 적고 차분했던 그의 안색이 상기되는 걸 느꼈다. "뭐라고? 그 #$#%이... 문실장 계획대로 해. 내가 책임질테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표실을 나왔고 공사는 차질없이 진행됐다.


사업 초기에 친지의 소개로 그 분의 선배되는 분의 일을 맡게 됐다. 큰 가구회사인데 본사 전시장을 인테리어하는 일이었다.

모 공단에 있는 본사를 방문해서 첫 미팅을 가졌다. 회사 대표가 근무복 차림으로 맞았다. 직업적인 촉으로 회장실의 소품, 가구, 사무실 전경에서 근검하고 깔끔한 성품임을 알아챘다.

식사를 구내식당에서 하게 됐다. 아니나다를까 집기며 시설은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데 윤이 날만큼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이후 과정은 무난했고,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작업 진행하며 친해진 임원 한분이 " 아마 나중에 회장님이 별도로 말씀하실텐데 너무 마음 상해하진 마시라"는 알듯 모를듯한 말을 해준 것 말고는...


완공을 했다. 검수도 했고 이제 잔금을 받는 수순만 남았다. 회장이 찾는다고 했다. 당시 그 회사는 KOEX에서 가구전시를 하고 있었다.

전시장으로 갔다. 그가 서류 뭉치 한다발을 꺼냈다. 이전에 제출했던 견적서다.  첫 장부터 한장 한장 넘겨가며 체크한 항목을 짚는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 할로겐 램프가 12,000원인데 알아보니 10,700원이면 구입하더라"  " 어디에는 뭐가 빠졌더라" 는 식이다. 당연히 추가적으로 더하거나 사양을 높인 경우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지막 장을 다 덮을 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말씀 다 하셨습니까?"

" 그러니까 내 말은 잔금에서..."

" 계약서 가지고 계시지요. 잠깐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의 눈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 아...아니 그게..." 내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해했다.

" 회장님 저 비록 전세살지만 남은 잔금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남은 공사비는 없는 것으로 하지요. 증빙 서류도 없어졌으니까요" 일어섰다. 그리고 미련없이 전시장을 나섰다.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주하기도 싫어 전시장을 빠져나오는데 헐레벌떡 뒤쫒아 온 회장이 내 팔목을 잡았다.

"아니 이 사람...젊은 사람 성격이...사업하는 사람이 이렇게 불같아서 쓰나... 그러니까... 내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이어갔고, 나는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업체 대금 결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전세금을 뺄까? 어디로 이사가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음 날 오전. 어제 일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경리과장이다. " 아침 일찍...ㅇㅇㅇ공사 잔금 전액 입금됐는데요"


아마 아내도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을런지 모른다. "니 아빠가 그놈의 승질만 죽였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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