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빙하 위 북극곰이 건네는, 손끝만 닿아도 차가움에 소스라칠 것 같은 유리병 속 병 속 검은 액체. 청량하다 못해 짜릿한 음료로 각인됐던 콜라. 카자흐스탄으로 급작스러운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 내게 콜라는 그랬다.
떠밀리다시피 간 이민이었다. 나는 줄곧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럼에도 하루 한두 시간 정도 ‘이불’, ‘소녀’, ‘가지’ 같은 서로 맥락은 없지만, 나름 적소에 쓰일 법한 단어들을 배우고 있었다. 수업을 뺀 나머지 시간엔 동생과 ‘한국 가고 싶다’ ‘떡볶이 먹고 싶다’ 같은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한국어로 나눴다. 너희 같이 ‘말 못 하고 이방인 티 나는 사람들’에게 밖은 위험하단 말에 돌아다닐 생각은 못 했다. 그나마 콧바람 쐬러 가는 곳은 아빠의 사무실이었다. 거긴 우리에게 작은 한국이었다. 사무실에 간 날엔 빈자리 남아 있는 컴퓨터에서 지뢰 게임을 조금 하고, 쭈뼛쭈뼛 회사 식당에 들어가 한식을 얻어먹곤 했다. 그런 우릴 아빠의 동료가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너네 혹시 교회 가 봤니?”
“… 아니요, 집이 불교라서요.”
“아저씨가 꼭 하느님 믿으라는 게 아니라, 가면 친구도 많고 좋아. 말도 배우고. 이번 주말에 나랑 한 번 같이 가 볼래?”
인중을 향해 쭉 눌러앉은 넓적한 코와 주걱턱 덕분에 ‘타이슨’이란 별명을 가진 아저씨는 현지인 아내를 만나 정착한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도 가본 적 없던 예배를 가게 된 건, 은근하고 뚝심 있게 전도의 원투펀치를 날리던 타이슨 씨의 공격이 유효했던 어느 날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 신도인 카자흐스탄에 많지 않은 개신교 교회였다. 대부분은 한국인 선교사가 세운 작은 개척 교회로, 그 안의 절반을 고려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소수의 현지인과 우리같이 한국에서의 삶을 등지고 이민 온 한국인 가족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타지에서의 답답한 마음을 치유받고 싶었고, 누군가는 언어를 배우고 싶었고, 또 누군가는 사업적 인맥을 쌓고 싶었다. 저마다의 기대로 성스러운 시간이었고, 우리도 그 틈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손을 모았다 풀었다 하며 러시아어가 술술 터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반갑기도, 낯설기도 했던 한국어 설교 시간은 끝났고 또래 아이들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자, 두 자매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세요.”
청년부로 이동해 다시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환영과 축복의 시간입니다. “
말 못 하는 나와 동생의 통역사를 자처해 주던 선교사님의 말에, 고려인 청년 대표가 기타를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익숙한 듯 우리를 향해 부드러운 선율로 노래(그의 시점으로 ‘찬양’)를 하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환영의 메시지를 담은 눈빛으로, 청년부 대표는 신실하게 열창했다. 한국어 가사의 발음이 조금 어색했던 걸 빼면 영적으로 미숙했던 당시 고1의 나에겐 영락없는 사랑 고백이었다. 몸에서 뿜어지는 후끈함으로 나는 내가 빨갛게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혹스러움도 출출함이 느껴질 만큼 잦아들 무렵, 무리를 따라 들어선 주방 겸 식당에서 또래 친구들은 익숙하게 빵칼과 벽돌 덩어리를 꺼내 들었다. 그건 긴 여행에 베개로도 쓰였다는 벽돌 식빵이었다. 바깥은 딱딱했지만, 잘라보면 발효가 잘 되어 구멍이 송송 나 있고 보리빵 같은 쫄깃한 식감이 느껴졌다. 옆에 앉아 줄곧 우리에게 친절하던 자매님을 따라 나도 빵 위에 버터를 넉넉히 바르고 ‘깔바싸’라 부르는 훈제 소시지과 두툼한 치즈를 켜켜이 올려 먹었다. 낯설고 깔깔한 기분도 함께 부단히 삼키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마시는 시늉을 하며 같이 나가자는 제스처를 보이는 친구가 있기에 그를 따라 교회 옆 구멍가게로 갔다.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를 꺼내들 거란 내 첫 번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애초에 냉장고엔 음료수가 거의 없었다. 대신 그 자리는 상온에 놔뒀다간 금방 상할 법한 유제품과 치즈가 채우고 있었다. 친구는 냉장고 밖에 아무렇게나 진열된 콜라와 환타를 집어 들었다. 나는 ‘아니, 날도 더운데 왜 그걸’이라는 말까진 진도가 나가지 않아, 아니 어쩌면 그 행동이 나를 뺀 모두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워 조용히 물음을 삭혔다.
계산을 하고 교회로 돌아왔을 때 별일 없이 마실 거란 두 번째 예상 역시 여지 없이 무너졌다. 형제가 콜라병을 잡고 쉐이킷 쉐이킷 흔들어 댔던 것이다. ‘오 노…!’ 주위를 빠르게 둘러봤지만 누구도 놀란 것 같진 않았다. ‘치이이이이익--’
말릴 새도 없이 청량함을 선사할 뻔 했던 가스는 이미 대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의미 없이 달고 뜨듯한 검은 액체만이 찰랑이며 컵에 담겼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미적지근하게 한 김 빠진 콜라를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던 건 동생과 나뿐이었다. 차가운 콜라에도 얼음을 넣어 마시는 판국에 김 빠진 뜨듯한 콜라라니…! 그렇게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콜라 사건은 우리에게 첫 번째 문화 충격으로 남았다.
미스터리가 풀리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여름에도 매 끼니마다 뜨거운 차로 식사를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며 서서히 이해를 했다. 원.래.가. 차고 자극적인 음료를 안 마시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이야 카페 메뉴에 구색 맞추기 식으로 ‘아이스커피’도 넣어 놨지만, 해외 문호에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땐 커피에 얼음 넣어달라고 했다가는 정신이 있냐 없냐 소릴 듣기 딱 좋았다. 찬 음료는 장을 상하게 하고 체온과 면역력을 떨어뜨려 건강에 좋지 않다는 나름 근거 있는 주장이었다. 배가 아프다고 해도 머리가 아프다고 해도 차를 한 잔 끓여주는 이들, 그들에게 찬 음료는 독이요, 따뜻한 음료는 약이었던 거다. 선진화되지 않은 의료 시설보다 효과 있고 믿을 만한 건 어쩌면 따끈한 음료와 함께하는 쉼이고 온기였을 테다.
그러고 보면 한 여름에 따뜻한 콜라를 마시며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니. 세상엔 애초에 몰라서 좋은 것도 있다 싶다. 그래도 따뜻하고 김 빠진 콜라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모르면 몰랐지 한 번 알면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