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욕망 꿰뚫은 ‘달과 6펜스’-artist 서머싯몸

- ‘달’을 좇을 기개, 그리고 ‘6펜스’에서 벗어날 용기

by 아로하


인간이 아름다운 것에 매료되는 것은 '본능' 아닐까.


- <달과 6펜스, 민음사, 2005>를 읽고



프랑스 인상파 화가 폴 고갱 (Paul Gauguin)의 그림을 처음 마주치면,

단숨에 강렬한 색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원색은 그야말로 탐미적인데 특히나 야성적 탐미이며,

깊숙한 본능을 끌어올리는 아름다움이다.

강렬한 만큼 사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몽환적 세계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얘기하는 ‘오리엔탈리즘’,

그러니까 서양인의 시각에서 그린 동양(그릇된 시각으로, 또는 편협한 시각으로)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이가 바로 고갱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어쩔수 없이 눈길을 끄는 것이다.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다.


<사진 설명> 달과 6펜스의 배경이 되기도 한 타히티 섬을 폴 고갱의 원색 스타일로 이미지화, Chat GPT.


프랑스 작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가

폴 고갱을 모델로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아마도 학교에서 미술수업을 들었던 한국인이라면,

중반부까지 읽어도 알 수 있다.

‘타히티’라는 단어만 들어도 퍼뜩,

그의 색상들을 떠올릴 것이다.

소설을 보며 마치 경험한 일인 것처럼 이미지화, 연상되는 작품이 몇이나 될까.

때문인지 <달과 6펜스>의 이야기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마치 어릴 적부터 보아온 그림처럼.


<사진 설명> 소설 달과 6펜스 표지 및 작가 서머싯 몸 사진 (위키백과 출처)


서머싯 몸은 이러한

독자들의 반응을 노렸던 것일까.

(유명인을 주인공으로 하면,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확신?)

아니면, 정말 개인적으로 폴 고갱에 대한 깊은 관심과 예술에의 깊은 탐구정신이 있었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둘 다'라고 생각한다.

서머싯 몸이 <달과 6펜스>를 출간한 1919년은

갱 사후 약 16년이 지난 시점으로 그의 작품이 한창 주목받기 시작하던 때이다.

그의 작품 속 오리엔탈리즘에 그는 매료되기도 했을 것이다.

때문인지 그는 이 작품 출간 이후 중국과 보르네오,

말라야(현 말레이시아), 일본 등지를 여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여행기를 출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처음 <달과 6펜스>를 읽었던 시점은 20대 중후반 무렵,

주변에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이가 없었더랬다.

당시 반드시 읽어봐야 할 소설 Top10쯤 되었던 듯하다.

반항심이었는 지 미루고 미루다 우연히 집어 들었는데,

그리고는 단숨에 완독했던 기억이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에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나 역시 서머싯 몸과 같이 예술, 예술가의 삶을 동경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미래 삶을 이상적으로 바라보며,

밤하늘 <달>을 대하듯 가치 있는 생을 살겠노라 다짐하던 청춘이었다.



<6펜스>로 표현되는 세속의 삶에 노출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때부터 성년이 된 이후 한참을, 20대 이후 내내 나는 친구 및 선배들로부터

‘그늘이 없다’, ’해맑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제는 그것이 칭찬이 아님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서글픈 것은 그렇게 말했던 이들의 첫마음을 알게 됐을 때다.

이를테면, “너의 청첩장에 찍힌 본가 주소를 보고, 네가 꽤 넉넉한 유년 시절을 보냈겠구나, 했어.”

또는 “해맑을 수 있다는 건 부모님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셨다는 거니까,,,

선배 고생 한번 안 하고 컸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부러웠어요.” 라는 말들.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나를 판단했다는 것이 서글펐다는 게 아니라,

그런 판단 후 이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달보다는 6펜스에 먼저 끌리는 것이다.


<사진 설명>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화가로 전향하기 전 금융인 시절 이미지화, Chat GPT.


주인공인 화가 스트릭랜드가 세속적 삶을 거부하고,

예술(제목에서 ‘달’의 또 다른 의미)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인간 초월의 가치다.


6펜스가 아닌 달을 좇는 삶을 선택하고,

한번 내린 생의 목표를 죽는 순간까지 지켰기에.

그가 금융인으로 돈을 꽤 잘 벌던 시절의 아내 (세속의 삶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와

더는 살 수 없었던 이유는 이런 지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먹고살기 위해 온갖 창피스러운 일을 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녀 역시, 고상한 여자가 흔히 같는 속일 수 없는 본능, 그러니까, 남의 돈으로 살아야 정말 체면이 선다고 여기는 그 본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P306

“그이 형편이 정말 어렵다면 저도 좀 도울 생각이 있어요. 제가 얼마간 선생님께 돈을 보내드리면 그이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전해 주셔도 되겠죠.” (중략) 나는 그 제의가 친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미학에 빠진 문학’,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는 곧 인간 본성_심미안.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유아기를 지나면 인간은 ‘성장, ’성숙’의 시기를 맞이하고,

그럴만한 나이가 되면,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것이 당연해진다.

이 과정에서 본능적 자기 탐구에는 소홀해질 수 밖에 없다.

때문인지 노년기로 갈수록 ‘아름다운 것들’, 이를테면 꽃과 같은 자연물,

또는 계절에 따른 자연의 경이로운 변화, 특히 그 美를 극대화 시켜 한 폭에 담아낸 그림(예술)에

더욱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파블로 피카소가 어느 예술의 경지에 이르러

“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그릴 수 있게 되는데 50년이 걸렸다”고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사진 설명> 드로잉 연습 작 가운데.


마흔이 넘어 드로잉을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나는 3개월이 지날 무렵,

연필을 잡고 스케치북 속으로 몰입하는 순간,

나의 뇌 속 격렬한 도파민 작용을 경험했다.

잘 그려서가 아니다.

극적인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그때

나의 쾌를 자극하는 신경물질과 만난 것이다.

이는 인위적인 것 같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진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그대로의 <몰입의 즐거움>이며,

이것은 곧 생의 에너지가 된다.


물론, 취미로 그림을 즐기는 범인(凡人)은 스트릭랜드가

캔버스에 펼치는 색의 향연 안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내며 느꼈을 희열, 황홀감 등

경지에의 쾌(快)를 가늠조차 못하겠다.

그저 최악조건의 가난과 병마, 고통,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그 앞에선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정도의 무엇.

그저 소설을 통해 어림짐작해 볼 뿐이다.


“스트릭랜드에게 성욕이 차지하는 부분은 아주 작았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귀찮은 일이었다. 그의 정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워낙 격렬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 때로 몸이 욕정에 사로잡히면 욕정의 광란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그는 침착성을 앗아가는 그런 본능을 싫어했다. (중략) 나는 예술이란 성적 본능이 구현된 것이라고 본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나 밝은 달빛을 받은 나폴리 항구, 티티언이 그린 <매장(埋葬)>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다 한가지이다. (중략) 지금까지 나 스스로 스트릭랜드를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야비하고 관능적인 인간인 것처럼 그려놓고, 이제와서 새삼스레 대단한 이상주의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나마저 이상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어쩌랴.” p221

“대개의 사람들이 품위 있고 아름답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돈에도 무관심했다. 명성도 안중에 없었다. 우리들 같으면 대체로 세상일에 적당히 타협하고 말지만 그는 그러한 유혹에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그를 칭찬할 수는 없다.” p221
“그가 친구들에게 바란 것은 오직 자기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자향하는 것에 온 마음을 쏟아부었다.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까지 희생시켰다(자기 희생쯤이야 많은 사람들이 하지만). 그에게는 비전이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긴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가 위대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p221

화자인 ‘나’는 그림에 미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을 줄곧 이해하기 힘들다는 톤으로 묘사한다. 그림 말고는 모두 후순위인 사람.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나 삶의 방식 역시 이해하기 힘들고,

괴팍하며, 이기적이고 냉소적이라 평하지만

생이 진행될수록 스트릭랜드의

위대함과 인격적 면모를 발견해간다.


이는 잘 나가는 대형 병원 의사직을 버리고 작은 보건국 관리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에 대한 대화를 통해

화자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으며,

독자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 시켜준다.


“인격이 없다? 다른 길의 삶에서 더욱 강렬한 의미를 발견하고, 반 시간의 숙고 끝에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동댕이치자면 아무래도 적지 않은 인격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갑작스러운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더욱 큰 인격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259

“정말 아브라함이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을까?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사 작위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어찌 감히 말대꾸를 하겠는가. p260

<사진 설명> 7-8년전 아이가 어릴적 어는 때 그림 전시 감상 중.

이토록 스트릭랜드의 삶에 호기심을 갖고 끝없는 관심을 이어간 작중 화자는

서머싯 몸 자신이 아닐까?

어쩌면 서머싯 몸은 예술에 자신의 전부를 건 스트릭랜드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예술성을 탐구하고자 했던 건 아닌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다양한 기준과 가치관이 있겠지만, 이 소설은

그중에서도 ‘본 적 없는 심연을 울리는 태초의 본능’안에서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美’을 찾아 끝없이 파고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래도 서머싯 몸은 글을 쉽고 재밌게 잘 쓰는 똑똑한 작가였지만,

천재성과는 거리가 있었듯 싶다.

폴 고갱의 작품을 비롯해 그가 말년 작업한

제2의 고향 타히티에서

화가의 삶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그의 여자들을 만나 속속들이 취재해

<달과 6펜스>를 완성시킨 것을 보면 말이다.

전형적인 ‘노력형 인재’의 특성이다.

때문에 작가에게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며,

일편단심 그림을 좇은 고갱의 삶은

동경의 대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달과 6펜스> 안에서 화자인 ‘나’에게서 느껴지는 스트릭랜드를 향한

낭만적이고 매혹적인 동경의 시선을 읽어낸다.

미지의 섬, 타히티에서의 삶은 이를 더욱 극대화 시킨다.

본국에서는 아무리 자유롭고 싶어도 시스템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속세란 그런 공간이다.

<6펜스>의 가치를 멀리하고는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중략) 그러다가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고 한다. 그곳이 바로 그가 애타게 찾아해맸던 고향인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죄다 태어날 때부터 낯익었던 풍경과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장착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p224


‘나’로 등장하는 화자는 스트릭랜드가 문득 타히티라는 작은 섬에서

작품의 열정을 불태우고, 짧지만 가장 행복하고 휴식했던 말년을 보냈던 이유를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가 원하든 원치않든

우리가 속한 세상은

'6펜스'가 의미하는 프레임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누구나 ‘달’을 향해 살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나 ‘달’을 좇을 수 있음을...


누구나 ‘달’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없음을 알지만,

어쩌면 누구나 ‘달’을 좇을 수 있다.

스트릭랜드는 그 누구보다 ‘6펜스’를 추구하는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본 자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인 천재들과는 달리,

마흔이 넘어 자신의 길을 찾았다.

화가라는 꿈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은 분명 평범하지 않았다.

때문에 소설을 통해 ‘꿈을 향한 삶’이 얼마나 고통을 감내해야 하며,

그렇기에 가치 있는가를 깨닫게 한다.


한편으로는, 스트릭랜드의 삶을 통해 누구나 ‘달’을 좇는 삶을

시도해 볼 수 있음 역시 알게 된다.

나이나 사회적 환경, 경제적 상황 등의 경계는 없다.

그저 ‘달’만 향해 가면 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명제다.


젊은이에겐 가슴 뛰는 삶을 설계해 볼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만한 소설이다.

나와 같은 중년에겐 제2의 꿈을 향해 도전할 계기가 될 수 있겠다.

혹은 지나치게 ‘6펜스’적 삶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노년에 나는 다시 ‘달과 6펜스’ 소설을 집어들 생각이다.

아름다움 본연의 예술을 한껏 즐겨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때 가서 진정 느껴볼 수 있을 듯하다.


물론 그러려면, 당분간은 ‘6펜스’적 삶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겠다.


“젊었을 때가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젊음을 잃은 노인들의 환상일 뿐이다” -서머싯 몸

(It is an illusion that youth is happy, an illusion of those who have lost it)



-끝-


<사진 설명> 달과 6펜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미지를 상상해 봤다 너무도 고갱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 Chat 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