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그레이스 마크스: 닥터 찰스 대신 답장합니다

- 결국 당신의 고백을 믿게 되었음을 고백하며

by 아로하

< 소설 그레이스, 마거릿 앨리노어 애트우드((주) 민음사, 2017년)>을 읽고


<사진 설명> 소설책 그레이스

안녕하세요, 그레이스 마크스.

당신의 편지에 대한 찰스 박사님의 답장을 대신 쓰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박사님은 정신적 문제로 인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지요.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박사님이 당신의 살인죄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또 당신의 심리를 탐구하기 위해 얼마나 깊은 고뇌에 빠졌는지.

그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결국 참전과 전쟁을 겪으며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소식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건강을 되찾았다면 분명 당신께 답장을 보냈을 거예요.


<사진 설명> Chat GPT로 만든 그레이스와 조던박사(넷플릭스 드라마 이미지 참고)

# 그레이스는 사이코패스 마녀일까, 아니면 마녀로 몰아간 계급사회의 피해자(생존자)일까

당신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나 역시 당시 대중들처럼 당신이 사이코패스적 악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19세기 중엽 캐나다, 여성으로서, 하층 계급의 이민자로서 당신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차별과 억압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녀가 되어야 했던 당신.

어린 동생들과 술에 찌든 아버지, 이민선 안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

당신의 유년 시절은 말 그대로 고통과 상처의 연속이었지요.


특히 이민선 안에서 어머니와 이별하는 장면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경험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때의 당신이 이런 고민을 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옵니다.


“저는 울지 않았어요. 죽은 사람이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 나인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죠. 하지만 펠런 할머니가 어머니를 그렇게 놔두면 안 된다고 했고,
마침 어머니를 묻는 데 쓸 만한 하얀색 시트가 있었어요. 그때부터 무척 고민하기 시작했죠. 우리한테는 시트가 세 장 있었거든요. 전부터 쓰던 두 장은 너덜너덜해져서 반으로 잘라 뒤집은 거였고, 새 시트 한 장은 폴린 이모의 선물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걸 쓰면 좋을지 모르겠더라고요. 헌 걸 쓰자니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새 걸 쓰자니 산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깝고. 제 모든 괴로움이, 말하자면 시트 문제 하나에 집중됐던 거예요. 결국 우리 어머니가 어느 쪽을 좋아하실까 속으로 생각해 보다
어머니가 살면서 항상 자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한 적이 없으니 헌 걸 쓰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헌 것도 거의 깨끗했거든요. p183”


이 장면에서 많은 독자들이, 특히 어머니를 잃은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슬픔을 느낄 여유도 없이

‘헌 시트를 쓸 것인가, 새 시트를 쓸 것인가’ 고민해야 했던 당신.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작가 애트우드는 끝까지 당신이 살인을 공모했는지,

아니면 이용당했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불확실성 때문에 찰스 박사와 이전의 매켄지 변호사가 당신을 면담하고,

오랜 시간 진실을 파헤치려 했겠지요.

# 제러마이어와 다섯 번째 단추, 그리고 험난한 바위들

당신이 제러마이어와 나눈 대화에서 저는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계급의 경계를 유일하게 넘나드는 인물이었지만,

결국 그 또한 체제의 중심에는 들어설 수 없었지요.

그가 당신의 손에 ‘다섯 번째 단추’를 올려놓고

“험난한 바위들이 기다린다”라고 말한 이유는

아마 당신 역시 그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쓸어 담고,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고,
이 집 요리사만큼 케이크를 맛있게 만드는 사람도 없다고 말을 하고 나가면서 저더러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더니 제가 산 단추 네 개와 잘 어울리는 단추를 한 개 주는 거예요.
제 손바닥에 단추를 올려놓고 손가락을 꽉 쥐어 주는데, 그 사람 손가락은 모래처럼 딱딱하고 푸석푸석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러기에 앞서 제 손바닥을 얼른 들여다보고는 다섯이라 재수가 좋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4를 불길한 숫자라고 하고, 홀수가 짝수보다 재수가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다음 반짝이는 까만 눈으로 뭔가 안다는 듯 저를 얼른 쳐다보더니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험난한 바위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누구나 험난한 바위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요, 선생님?
저 같은 경우에는 험난한 바위들을 잘 헤치고 이겨 냈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말을 듣고도 기죽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가 또 아주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너는 우리하고 비슷한 부류라고. 그러더니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지팡이를 들고 사라졌어요.” p233

그레이스, 당신은 선택의 주체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삶은 늘 타인의 결정과 폭력에 휘둘려야 했습니다.

제러마이어는 그 사실을 알았기에, 단추 하나에 ‘희망’이라는 상징을 담아 건넸던 게 아닐까요.

그리고 영매가 되어 나타난 그는 당신의 석방을 돕기 위해 조작된 점술을 내놓았던 것일지도요.

30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당신은 수많은 치욕과 차별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성적 대상화, 학대, 멸시…

당신이 당한 일들은 끔찍했고, 끈질겼습니다.

“잠시 후 교도관들과 함께 문을 나서는 시간이 되었다. 오, 그레이스 두 남자 친구와 산책을 나갈 시간이로구나, 복도 많지.
아니야, 복이 많은 건 우리 쪽이지, 우리 쪽이고 말고, 이렇게 맛있는 아이를 안고 있잖아, 하고 첫 번째 교도관이 말한다.그레이스, 네 생각은 어떠냐, 하고 두 번째 교도관이 묻는다.옆길로 살짝 새서 저 뒤 마구간으로 들어가 건초 위에 눕는 건 어때, 네가 가만히만 있으면 금세 끝날 거야, 몸부림치지 않으면 더 금방 끝날 테고.
누을 필요 뭐가 있어, 하고 첫 번째 교도관이 말한다.(중략) 너무 제멋대로 지근대지 말아 줬으면 고맙겠네요, 하고 내가 몸을 빼며 말한다. (중략) 내가 두 사람에게 모욕을 주더라도
그들은 능청스럽게 받아넘기고 그만일 테니,
나는 나중에 때가 되면 지상에서건 지하에서건 이 교도관들을 손봐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p351, 354)

이 대목을 읽으며 인간의 존엄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다는 현실에 분노했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밤을 눈을 뜬 채 보내야 했을까요.


<사진 설명> Chat GPT로 만든 감옥에서 퀼트하는 그레이스


#퀼트 조각처럼 이어 붙인 진실의 단편들

그레이스,

나는 결국 당신이 절대 악녀일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당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을 나눈 하녀 동료인 메리 휘트니,

그녀 역시 당시 사회적 억압의 피해자였죠.

그녀의 죽음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

아마 그 누구도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상류층 자제의 아이를 갖고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메리를 보며,

한때나마 한 남성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평범한 삶을 꿈꾸던 메리가

너무나 안타깝고 그리웠겠죠.


그리고 메리와 흡사한 삶을 꿈꾸던 낸시 마이어,

그녀를 살해한 맥더포트 그리고 이를 방조한 당신.

당신이 직접 낸시를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그 옆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신에게 무죄를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살인 사건만 놓고 봤을 때 피해자라고도 말할 순 없지만,

당신의 삶은 폭력적 일상에 억눌리고 너무나 차별받아야 했어요.

억울했을 텐데도 당신은 당신을 찾아온 닥터 조던에게

진실의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이어 붙였습니다.

마치 퀼트를 만들듯, 하나하나 꿰매며 닥터 조던 앞에 진실을 풀어놓았죠.

그 조각들이 온전히 진실이었는지,

일부는 거짓이 섞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매켄지 변호사의 말처럼,

어쩌면 당신은 이야기꾼 셰에라자드처럼 ‘살아남기 위해’ 이야기를 했던 것일지도요.


조던 박사님도 저와 같았던 것 같아요.

당신의 이야기에 흠뻑 빠졌더랬죠.

당신의 이야기와 당신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도 매우 혼란스러워했어요. 자기 삶의 정체성이 흔들릴 만큼.

그래서 이전에 당신과 상담한 매켄지 변호사를 찾아가

당신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보려 했겠죠.


“거짓말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이죠." 매켄지가 말한다. "
그녀가 거짓들을 하고 있느냐고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셰에라자드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녀 자신을 절대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실 그녀가 한 이야기 자체가 진실과 거짓이라는 엄격한 잣대로 나눌 수 없는 것이지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하니까요.
아마 그레이스 마크스도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말만 하고 있을 겁니다.”

"목적이라면.......? “

"술탄을 재밌게 하는 것이죠." 매켄지가 말한다.

<사진 설명> 유튜브채널 명작소녀가 소개한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의 한 장면-매켄지와 조던박사


하지만 그 이야기가 가진 진실성만큼은

박사에게, 독자에게, 그리고 저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요.

조던 박사가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공감해 주고 믿어주는 모습이

분명 당신에게 위안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그가 당신의 석방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여겼을 거예요.

조던 박사 역시 당신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며,

고백하는 모습에서 연민과 애정을 품었다고 생각해요.


<사진 설명> 유튜브채널 명작소녀가 소개한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의 한 장면-이야기하는그레이스


그레이스 당신이 더 이상 혼자만의 고통에 갇혀 지내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다는 것에서 진실성을 발견한 것이죠.

그 누군가는 당신의 이런 조용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요.

나는 당신이 메리 휘트니와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혼동하는 모습,

또 탈출을 꿈꾸던 상상들,

조던 박사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의지를 보고 확신할 수 있었어요.

“조던 박사님이 토론토에 갔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얼른 왔으면 좋겠다. 나는 웬일인지 이제 그에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조만간 떠날 사람이니 내 심장에 슬픈 구멍이 뚫릴 것 같아서 겁이 난다. 돌아오면 어떤 이야기를 해 드릴까? 어떤 식으로 체포돼서 재판을 받았고, 법정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알고 싶어 할 텐데.
어떤 부분들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져 있지만, 그를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집어낼 수는 있다. 색감을 넣고 싶을 때 헝겊 주머니를 뒤져 쓸 만한 천 조각을 골라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p517

# 그레이스, 당신은 생존자입니다

누군가는 당신과 제이미와의 결혼을 냉소적으로 바라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삶을 ‘받아들인’ 용기라고 생각해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과거를 껴안은 채 살아가기로 한 결단.

당신의 그 조용한 강인함이 퀼트 조각처럼 한 땀 한 땀 새겨져 있었습니다.


<사진 설명> 유튜브채널 명작소녀가 소개한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의 한 장면-제이미와의재회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던 건, 당신의 조곤조곤한 말투와 곧은 태도.

사람들은 그 품격에 반했다고 하지요.

저는 믿습니다. 당신은 단순한 피해자도,

절대 악녀도 아닌,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존재’라고.



<사진 설명> Chat GPT로 만든 그 이후 이야기 상상 장면

지금 나는 당신 그리고 당신의 딸과

조용한 전시실 안,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오후를 상상합니다.

벽면에는 조용하고 단단한 빛을 머금은 퀼트가 걸려 있고,

‘나무 모양’, '기러기 발자국‘,’ 잃어버린 정원‘,’ 휘트니의 조각‘ 등,

각각의 타이틀이 작은 동판 위에 새겨져 있죠.

아마도 아이는 이렇게 물을 것 같아요.

“이거, 엄마가 만든 거야?”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 아주 오래전에, 이야기로 만든 천들이야.”

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이야기?”라고 재차 묻는 딸아이에게 이렇게 답할 것 같아요.

“아직 말하긴 이르단다. 하지만 언젠간 알게 되겠지.

손끝으로, 천의 감촉으로...”


from. 그레이스 당신의 또 한 명의 친구 드림


*p.s. : 마거릿 앨리노어 애트우드 작가님께.

실화를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신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레이스》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문학의 힘으로 과거를 다시 호흡하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심리학의 태동과 함께 그 시대 여성들의 억압된 삶을 이야기로

되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 없이 사라졌던 수많은 여성들,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다음 세대의 딸들에게 남겨진 유산이죠.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레이스와 닥터 조던 사이에 마지막 이별 인사가 없었다는 점이에요.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를 은근히 기대했던 저로서는 살짝 아쉬웠지만^^,

그 여백마저도 의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상에서 단순한 암시에 그치고 누가 봐도 분명한 빈틈이 발견될 때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p677 마거릿 앨리노어 애트우드 ((주) 민음사, 2017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