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

성찰록: 지식과 영성

by 바루다

나는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누운 상태로 기상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다. 엊그제 유튜브의 어느 강의에서 지나치듯 언급한 지식을 왜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떠올리고 있다. 내가 책과 영상물 그리고 과거의 정보를 통한 것들로부터 배운 것들이 내 안에서 충돌하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티베트의 수도승 밀라레빠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그가 큰 깨달음을 얻고 그 당시의 학자를 대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가 깨달음이란 것이 높은 수준의 요가와 몇 가지 도술을 부린다는 것 말고는 책을 덮고 나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깨달음에 이르는 고행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과 하늘을 날았다느니 등등. '불멸의 열쇠' 또한 예수 이전 시대와 그 이후의 서양 종교사에 관한 내용으로, 약물을 통해 쉽게 신과 하나 되는 것들에 관한 내용이다. 그 체험을 통하여 만물이 하나임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온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이타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내용이다. 영상물들에서 영성을 말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자각을 통한 이타적인 삶을 말하고 있다.


나에게 문제는 왜 신이 굳이 어린아이처럼 맑은 상태의 우리를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삶을 통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힘들게 하고, 어쩌다 탐욕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받들어 찬양하느냐이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러했다. 나는 내 안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선지식을 가진 분들의 영상이라든지 책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정법강의를 유튜브에서 접하게 되었다. 오래되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접하게 된 것은 5~6년쯤 전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퇴근 후 집에서 유튜브를 켜고 인문학 강의 중에 들을 만한 것을 찾아 듣고 있었는데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얼마간인지는 기억나지 않고 내가 눈을 뜨니 머리와 수염을 기른 양반이 나와서 뭐라고 떠들고 있다. 누군가 싶고 뭐라고 하나 싶어서 그냥 두고 들어보고 있었다. 언뜻 들으니 내 상식과 충돌이 일어나고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해가 안 돼서인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내 지식과 논리로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반박이 안 되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내가 가진 지식이나 상식이 옳다고 판단할 만한 증거도 딱히 없다. 그냥 누군가로부터 학습을 통해 배우고 익힌 것들이 먼저 왔다고 텃세를 부리거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혹 떼려다 혹을 더 붙인 꼴이다. 관습과 규범, 도덕, 정의 이런 말들은 때론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인간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그 시대에 맞게 정해서 마찰을 줄이는 역할, 또는 일부에게는 다수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그랬으니까 옳은 것은 아니다.


상·중·하라든지 살인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는 '아니 이 양반이 산속에서 17년 수행했다더니 정글의 법칙을 배워서 인간들한테 적용할 참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뭐 안 듣고 안 보면 되는데, 또 무슨 이유인지 그것은 안 된다. 어느 날 출근을 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우리들이 믿거나 따르는 그 어떤 신이 나 성인이 자신이 한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직접 들려주는 경우가 있었는가?"였다. 예수와 석가는 왜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없을까? 그 당사자에게 알아듣도록 말을 하는 순간은 진리이지만 글로 기록되면 지식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글을 몰랐을까?


그리고 그들이 한 말들이 그 당시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함이지 미래의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2~3천 년 전도 아니고 현대의 수많은 전문 지식인들이 모두 들을 수 있고 자신의 분야에서 따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1만 2천 강에 가까운 강의를 이어가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중간에서 누군가의 포장이나 미화가 불가능한 상황 아닌가? 이것은 엄청난 자신감이 아니고는 가능한 일인가?


"그래, 진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지자일 수는 있겠다" 싶었다. 그날 이후부터는 내 상식을 거두고 나와 부딪치는 강의를 들으면 "왜 그럴까?"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우리가 지식을 갖추는 것은 보잘것없는 것이며, 신을 믿음으로써 영적으로 신과 하나 되는 영성을 얻는 것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볼 때 훨씬 대단해 보인다. 이점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아니, 그럼 왜 사느냐"이다. 어린아이의 맑은 상태에서 죽어버리면 깨끗한 영혼으로 천당에 갈 것인데 부질없는 삶을 통해 무얼 얻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항상 살면 살수록 죄지을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것도 위대한 신의 설계에 의해 이러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어릴 때는 절대적으로 부모님의 보호가 필요하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부모님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내 의지에 의한 삶은 늘어나며 성장한다. 그리고 다 커서 성인이 되면 자신이 일가를 이루어 독립하여 삶을 유지하고 부모로부터 독립한다. 우리의 역사가 한 개인처럼 성장하는 단계라면 인간의 삶의 초반에는 신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그냥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주위 환경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경험을 통해 지식을 쌓고 살아간다. 사실 배움의 관점에서 보면 '좋다 나쁘다'는 의미가 없다. 이런 경험 저런 경험으로 보면 맞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수많은 지식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자손들에게 물려주면서 현재에 이르러 있다. 오늘 나의 삶은 내일을 사는 누군가의 밑거름이 된다. 누군가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든지, "저 인간 왜 사니" 하든지, 우리는 상대를 보면서 배우고 있다.


성장의 시기에는 이기적인 욕심과 경쟁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의 역사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삶에서 배움(지식)을 제거해 버리면 먹고사는 문제만 남아 동물과 구별이 안 된다. 인류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전쟁은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작은 부족에서 더 큰 집단으로의 끝없는 확장을 해온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그러해야 하는가? 종말론의 배경에는 우리의 이기심과 성장과 확장이란 바탕을 깔고 있다. 현대의 지식인들이 과거처럼 전쟁으로 이루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종말적인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과거의 영성만 있고 지식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영성을 가진 자가 신의 대리인 역할과 약간의 도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대의 지식인들은 과거의 신들이 보유한 거의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다. 몇 천 년 전에 인간이 현대의 우리를 본다면 우리 자체가 가장 위대한 신이 아닐까? 과거의 최초 인류부터 현재의 우리까지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자식을 낳고 죽으며 무엇을 이루려 했을까? 이 문제를 푼다면 신의 의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최초의 인류부터 현재의 인류에 이르기까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인류가 그동안 이룩한 물질적 풍요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인가? 이들의 해답은 지식이다. 어쩌면 영성은 최초의 인류가 우리보다 맑지 않았을까? 지식이 맞는다면 신은 우리들이 쌓은 지식을 통해 무얼 이루려 함일까? 사실 내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은 다 부수적인 말이고, "왜 우리는 지식을 쌓고 성장해서 지금에 서 있는지"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물론 영성을 갖춘 지식이라면 미래에 가장 적합하지 않겠는가? 지식인이 깨달으면 영성 지식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지식을 왜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 한다. 지식을 갖추어서 그럼 뭘 어쩌자는 거야. 동물 같은 최초의 인류로부터 신 같은 현대의 인류가 도대체 왜 필요한가? 우리 인간의 원죄에 관한 내용이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은 지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신의 영적인 힘이 인간을 이끌어 이룩한 것이 과거의 문명이라면, 현대 문명은 성장한 우리가 신의 도움을 받아 이룩한 것이다. 주체가 다르다. 성장하기 전에는 신이 인간을 이끌지만 성장을 마치면 우리가 신을 이끈다.


미성숙 단계의 지식으로 만든 문명은 다음 단계로의 진입이 안 되어 멸망을 한다. 현대 문명도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지혜를 열지 못하면 멸망을 맞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때에 과연 다음 단계로 어떻게 넘어갈까? 도대체 다음 단계란 무엇인가? 어디로 가야 할까?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지식은 상식을 만들고 상식은 우리를 가두고 고집을 만든다. 모두가 각각의 분야에서 지식인인 현대는 서로의 것을 주고받으며 의논해서 어떤 문제를 풀어야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작은 집단은 뛰어난 한 사람이 바꿀 수 있지만, 지금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혼자서 바꿀 수 없다. 우리는 70%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 삶을 살아간다. 신들도 우리 삶에서 터치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우리가 합심하지 않으면 지금부터는 어떠한 문제도 풀 수 없다. 하느님이 직접 이 땅에 온다 해도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인간이 자기 의지가 없다거나 무식하거나 할 때는 신이 와서 가능할지 모르지만, 유식하고 자기 의지를 가졌다면 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다.


신이 와서 신통력을 발휘하여 이 세상을 일순간에 바꾸는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온 모든 선지자가 한 것은 우리를 가르치는 교육을 하고 미래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 것이지 일순간에 세상을 바꾼 일이 없다. 인간 개개인은 모두 자기 역할이 있고 시대의 변환기에 그들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하늘이 하는 일은 아닐까?


만일 신이 자기 의지로 일을 이룰 수 있다면 그냥 이루면 되지 뭐 하러 대리인을 보내고 자기 의지로 한 일을 누굴 벌할 수 있겠는가? 머리가 시킨 일을 손발이 했다고 손발이 죄인가? 신이 전지전능하여 알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면 책임자로서 더 큰 죄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애가 모르고 물가로 가서 빠져 죽으면 빤히 보고 있는 부모의 책임이 클까, 모르고 간 아이의 죄가 클까? 인간이 모르고 행동하고 아파하니 신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가르치기 위해 각각의 지역에 선지자를 보내 알려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에게 죄를 물으려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야만 하고 그 일정 영역은 누구도 터치하지 못해야만 한다. 우리 부모가 자식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기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사 또한 열심히 잘한다고 살고 있지만 수많은 모순이 생긴다. 우리는 남에게 피해를 주려는 마음이 없지만 누군가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처를 주고받는다. 왜 이런 일들이 생겨날까?


우리가 지식을 쌓아 풀어내야 하는 일이 그런 것에 관한 해답을 찾는 일은 아닐까? 인터넷 세상에서 넘쳐나는 지식, 책에서 배운 지식과 정보를 남보다 조금 더 안다고 세상모르고 나와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는 행동들이 이 사회에 주는 피해가 얼마인지 알기는 할까? 물론 그 행동까지도 우리가 보고 배우는 학습장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식을 쌓았지만 영혼이 탁해지는 결과도 낳았다. 영혼이 탁해졌다는 것은 종교에서 원죄를 뜻하기도 하고 우리가 전생을 살면서 탁해진 것이라 한다.


탁하고 무거운 영혼을 맑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이타행을 하거나 이광공익을 행해야만 가능하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우리들의 업은 해소할 길이 없고 천상에 갈 수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거의 방식으로 남을 돕는다고 하는 것도 이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신은 누구에게는 재물을 많이 줘서 남을 돕고 선행을 하게 하고, 누구는 빌어먹게 만들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왜 만들었을까? 그것이 진정으로 남을 돕는 것일까. 사후를 위한 선행의 실적을 쌓거나 자신의 평판이나 만족을 위하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남에게 그냥 줄 거라면 내 쓸 것만 가져오고 그냥 두면 누군가 가져가면 되지, 내가 가져와서 다시 나눠주는 수고로움을 왜 만들까. 그리고 다른 사람도 많은데 당신에게 재물을 줘서 당신이 선행을 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기쁘고 행복해야 하며 당신을 천상에 가게 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당신은 이런 선택을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가장 쉬운 "내가 가진 재물을 조금 주고 믿었는가?" 그러고 나서 그 믿음을 확인받기 위해 안하무인이 되어 있지는 않는가? 당신이 도움을 받는 경우는 왜 못마땅하고 모순이라 생각할까?


오히려 상대에게 베푼다는 기쁨을 주고 당신의 노력이 그들을 살찌우며 그들이 싫어하는 궂은일을 함으로써 선행을 베푼 것은 아닐까?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는데 왜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안달이 나 있을까? 지옥에 가고 싶어서 환장을 한 것일까? 이 시대에 부자와 가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와 그 안의 수많은 모순들을 우리들의 시각으로 다시 봐야 한다. 이제는 자신이 믿는 선지자의 말만 옳고 다른 이의 말은 옳지 않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지식인들이 현재를 살면서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 수많은 모순들을 연구해서 하나하나 바로잡아야 한다. 끝없이 과거의 선지자에게서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참고해서 현재의 우리들의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 석가와 예수도 그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데서 깨달음을 얻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은 그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려 했지 미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현재의 우리의 문제를 몇 천 년 전에 죽은 그들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는가?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 시대의 예수와 석가가 되어 우리의 모순을 풀어내야 한다. 어린아이의 단점은 무지와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성인이 된 우리가 어린아이 때 익힌 규범과 규칙에 매여 우리에게 적합하도록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장사꾼 지도자들의 죄가 가장 크다 하지 않았는가. 역사를 통해서도 지도자라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위해 노력했지 국민들이나 백성을 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쩌면 그들은 당신들의 구원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할 뿐이다. 과거의 무식한 자들도 아닌 현대의 지식인들이 바로 서지 않는 한 세상의 부조리는 한 발짝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각자가 배운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분야와 주변부터 모순들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자기주장이 아닌 각자가 가진 소질을 바탕으로 한 타협으로 이루어내야만 한다. 과거의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모든 것을 다시 검토해서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손들에게 적합한가를 물어서 바로잡지 않으면 그 끝없는 자살들과 사회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이타행과 이광공익을 행함으로써 홍익이념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며 살다가, 천상에 모여 이 땅의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오면 원시반본(原始返本) 하여 우리가 온 본래의 우주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다시 운행될 때 이전과 같은 마찰을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구에 와서 수많은 모순을 만들고 바라보며 살아왔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지식을 통해 알아내고 해소함으로써 원시반본 후에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생각하는 것과 지식을 쌓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가능하고 신과 영혼들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성행위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만인 만법이고 해설이 다르다.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는 형체가 없는 행위를 설명하려니 자신이 알고 이해하며 느낀 만큼 설명이 가능하다. 행위를 글로 표현하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서 지식으로 변한다. 진리는 행위의 순간들의 연속이 아닐까? 그리고 언어의 한계도 있어서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도 어려움이 존재한다. 표현력이 뛰어난 언어일수록 진리를 담는 데 유리하다. 그리고 질문자와 듣는 이의 수준에 따라 이해도가 완전히 달라져서 각각의 해석도 달라진다.


아이가 "내가 어디서 왔냐"라고 물으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고 하고, 좀 더 크면 "부모가 손잡아서 만들었다" 하고. 어떻게 말하든 알고 나면 통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행위를 글로 표현하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이고 말로 하는 것은 그보다 위 단계이며, 신음 소리를 듣는 것은 말보다 위 단계이고 직접 느끼는 것은 실체에 접근한 것이지만 최종 단계도 그 깊이가 다르고 깨달음도 이와 같다.


그전의 행위가 다음 행위와 똑같을 수 없고 각자의 행위 또한 같을 수 없다. 나는 도의 세계라는 형체가 없는 것을 주변에서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편으로 성행위를 예로 들어본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통해 이해한 것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의 차이만큼, 우리가 지식으로 배워서 이해하는 것과 직접 깨달은 차이는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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