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렵고 아프고 화날까?

탐진치

by 바루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좋은 글은 만들어 놨는데, 오늘날 우리는 이 글만 만지고 있지 풀어낼 사람이 없다. 글이나 말은 우리가 쓰기 위해 있는 것이지 그것을 추종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글이나 말을 추종하며 수없는 시간을 만져도 그 근본을 바르게 만져서 행까지 하고 간 사람이 없다. 우리가 욕심을 낸다든지, 화를 낸다든지,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든지, 이런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하면 자신의 인생을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우리가 인연을 만나는 이유와 깊이를 모를 때이다.


예를 들어서 상대가 자신에게 화를 낸다면 우리가 역지사지해서, 자신도 남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화를 내지 않기 때문에 상대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고, 그것을 자신이 정확하게 알고 이해를 하면 상대에게 화를 낸다든지 안 좋은 행동을 자제하게 된다. 상대가 자신에게 악하게 대하는데 상대가 왜 그런지 자신이 그 깊이를 모를 때는 반사적인 행동이 나온다. 또한 자신에게 어려움이 오고 아픔이 왔는데 왜 왔는지 그 깊이를 모를 때 불평불만이 생긴다. 자신에게 어떠한 어려움도 안 오고 아프지도 않고 아무도 안 좋은 행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은 화를 낼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화를 참으려고 노력하고 탐진치를 없애라고 말로 해서는 없앨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참을 만큼의 한계를 벗어나면 정확하게 밖으로 튀어나온다. 산에서 수행을 할 때는 혼자 있거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자신이 탐진치로부터 아주 멀어진 것처럼 생각한다. 산속의 삶이란 것이 고만고만해서 욕심을 내고 화를 낼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사회에 나와서 자신은 힘들고 어려운데 다른 사람은 열심히 안 하는데도 부모덕에 놀고먹고 있으면 불평이 나온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서 욕심이 없고 과거에 내려오는 경을 좀 읽고 앉아서 아는 척하면 그것을 수행이라 한다면 이 나라에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좋은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 행동이 안 될 뿐이다. 우리는 왜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며 이루어 낼 수 없는지 풀어보고, 우리의 삶 속에서 탐내지 않는 법을 만들어 나가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탐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속에서 수행을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탐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참으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삶이 어떤 삶인지 알면 된다. 즉 자신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현생을 살면서 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논리가 만들어낸 것이고, 논리의 변화에 따라 죄도 변하고 그 대가를 살면서 치른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고 어렵고 힘들고 화내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3차원에 온 이유는 우리의 원죄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알아내고 우리를 맑히기 위함이다. 죄의 원리는 상생을 해야 하는데 역행을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갚고 맑히려면 상생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서로를 이롭게 해야 된다.


그래서 자연은 우리에게 인연을 줄 때 가장 서로에게 역행을 한, 우리가 원수라 부르는 사람일수록 가깝게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돕지 않으면 죄가 절대로 없어지지 않게 되어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 오는 이유가 원죄를 벗기 위함이고 나머지는 모두 방편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우리는 현생을 살면서 방편에 빠져 버려서 우리가 인간으로 오는 의무와 삶의 목적을 상실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과거에 비하면 엄청나게 부유한 삶을 누리지만, 아프고 힘들고 어려움이 전혀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온 재주들은 그것을 통해 인연을 만나고 그 인연들을 통해 서로를 이롭게 하는 방편이지, 노래를 잘하고 축구를 잘해서 부유하고 인기를 누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가 그만큼 크기 때문에 큰일을 해야 갚을 수 있으므로 그런 기운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도 어떻게 하면 우리의 원죄를 벗고 맑힐 수 있느냐를 알아내고 깨우쳐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알고 반드시 행해야 하므로 죄를 벗는 방법이 결코 쉽지 않다.


서쪽 사람들은 과학을 발전시키며 성장을 했고 동쪽 사람들은 정신 철학을 발전시키며 성장을 했는데, 오늘날 물질만능주의가 퍼지면서 서쪽을 추종하고 따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지구를 고목나무로 본다면 뿌리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안쪽인 대한민국이고, 몸통은 히말라야 산맥과 천산산맥의 안쪽인 중국이고, 그 바깥쪽이 가지인 서양에 해당한다. 길이가 삼천리이고 둘레가 칠천 리로 합수(合水)이자 공수(供水)인 이곳이 나무의 뿌리이다. 대자연의 법칙인 3대 7의 함수와 같은 곳이다.


우리는 대부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을 하면서 윤회를 하고 이 땅에 태어나면 윤회의 마지막 단계에 온 것이다. 그래서 이 민족은 반드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된다. 지금 마지막 일생을 받은 사람들은 이전 단계를 모두 밟고 올라온 것이다. 이들은 모두 수행의 꽃인 덕행으로 살아야 하고, 진실로 득 되게 사는 것이 뭔지 공부하고 수행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이들은 물질로는 이타행이 되지 않는다. 물질은 상대를 게으르게 만들어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바르게 찾는 데 방해가 되고 버릇을 나쁘게 할 수 있으므로 아주 깊이 들여다보고 정성을 다해 이끌어줘야지, 잘못하면 돕는 게 아니고 수렁에 빠트리는 결과가 나온다.


아무리 좋은 글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환경의 사람이 있고, 아직 다 자라지 못해 그 말을 행할 수 없는 환경의 사람이 있다. 교육이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맞는 것을 가르쳐야지 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면 한 뜸도 행하지 못하고 자꾸 비틀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단계가 있고 우리가 인연으로 만났다면 만남은 1안이고, 만나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가 2안이다. 우리가 2안을 모르면 1안으로 동물적인 행위와 그런 삶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는 것도 이유가 있는데,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다가 죽어 버리면 왜 왔다 갔는지 모르게 되어 살면서 가진 방편에 집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거야말로 인생무상이다. 지식을 많이 갖추고, 돈을 많이 벌고 재주를 갖추고 오행이 아주 바르게 생긴 것까지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기운에 따라 사주를 받아 온 1안이고, 어떻게 쓰느냐가 2안인데 이것은 자신의 갖춘 질량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생의 자신의 노력과 업적에 따라서 다음 생에 더 질량 있는 환경에서 태어난다.


나뭇가지에 해당하는 서역의 사람들은 탐구하는 수행을 하므로 살면서 온갖 것들을 경험하려고 노력한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나뭇가지와 몸통이 하던 것들을 윤회를 하면서 다 거쳐서 여기에 왔다. 수행법을 잘 들여다보면 서역으로 갈수록 미개하고 동쪽으로 올수록 자세가 잡혀 있다. 점잖고 느리지만 바르게 분별을 해서 처리하는 민족이라서 윗사람답게 수행도 그렇게 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수행은 이렇게 몸통이나 가지가 하는 수행과 달라야 하고, 그 근본을 들여다보고 이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정리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몸통과 가지가 하는 수행법을 따라 한다고 몇십 년을 그러고 있다가 죽는다. 우리가 마지막 일생을 받아 왔다는 것은 다음 생이 없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갖춤으로 어떻게 행하고 가느냐는 것이다. 글에 자신을 불살라서 이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하니까 자기 몸을 불사르는 등신불을 하는 무식한 짓을 한다. 이것은 아직 영혼들이 신생에 더 가깝기 때문이고 우리가 서쪽으로 갈수록 순박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우리는 윗사람으로 그들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지금 그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하기 때문에 나중에 전부 다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동물처럼 살고 힘으로 하면 서양이 유리하고 사람답게 살고 지혜로 하면 이 나라가 인류를 이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서양의 방식으로 서양과 싸우려고 하면 볼 것도 없이 백전백패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수행법은 탐진치를 없애려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고 진정 남을 위해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고 행하며 인생을 살면 탐진치는 스스로 소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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