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연기법과 영혼의 부정에 관한 나의 생각
나는 누군가가 연기법을 말하며 마치 인간이 무슨 찰나마다 다른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 것에 왠지 굉장히 불편함을 느낀다. 불교의 연기법(계절이 변하는 것처럼)은 뭔가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고 집착을 놓게 하기 위한 방편이지 이것이 그 본질인 진리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어떠한 현상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이 연기법으로 우리가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이론으로만 존재한다면 이것을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이것이 부처가 그토록 고뇌한 우리의 인생과 삶과 죽음, 그리고 집착을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우리는 마치 이 연기법이 현상들을 잘 설명하니까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들을 부정하려 한다. 물이 어떻게 순환을 거치든 H2O이고 우리 눈에 다른 모습으로 보일 뿐 그 근본은 변함이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르다고 그 본질을 부정할 수 없다. 엄연히 존재하는 자신을 연기법으로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은 인정하고 부처를 인정한다.
그러면 일생을 살다 간 부처가 찰나마다 다르다면 그가 남긴 말은 누구의 것이며 무엇을 불교에서는 붙들고 있는가? 살아서든 죽어서든 집착을 없애기 위한 이론으로 자기 자신에 해당하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면 우리는 현실을 물질적 존재인 육신만이 존재하고 그것도 연속성일 뿐 "나"라고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의식이 있어서 그렇게 살 수가 없고 그렇게 사는 사람도 없다. 자신들이 없다는 그 무엇을 붙들고 열심히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집착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존재를 아무리 부정해도 존재하기 때문에 지울 수 없다는 뜻이다. 도대체 무엇이 해탈을 하고 윤회를 하는가? 어떤 이는 명상을 하다가 자신을 놓으면 존재가 사라지고 하나로 다가오는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멀리서 산의 전체를 본다고 해서 그 산에 존재하는 나무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산속의 나무는 개별로 존재하지만 산의 일부이고 산과 하나이다. 부분적인 것으로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은 항상 주어진 환경에 자신이 아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닐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은 지금 자신의 환경을 다 이해한 것이 아니므로 지금 자신의 행동을 함부로 평가하고 입을 대서는 안된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이 갖춘 만큼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러므로 각자 우리는 모두 옳다. 자신의 시야가 열리는 만큼 보일 뿐이다.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누군가의 논리를 정리한 것이고 논리는 사견이다. 그러므로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자신의 질량은 커지지만 어쩔 수 없이 탁해진다. 우리는 이것들을 흡수해서 융합하고 맑히며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든 에너지를 쓰고 그 에너지의 양에 따라 힘들어하거나 좋아한다.
이 둘의 차이는 어떤 환경이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어느 면을 바라보느냐의 차이에서 온다. 즐거움은 바른길을 찾았을 때이고 또 바른 일을 행할 때 즐거운 것이다. 누구에게 뭘 받으면 좋은 것이지 즐거운 것이 아니다. 바른 일을 행할 때 즐거움은 오는 것이고 그것이 앞으로 미래의 자신을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