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왜 어렵고 힘들고 아픈가?

선진국 행복지수 낮은 이유

by 바루다

삶에 대한 의문

오늘날 우리는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물질적 풍요와 수많은 지식을 갖추었는데 왜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을 하고 몸이 아플까? 3천 년 전에 이 땅에 다녀간 부처가 생로병사의 깨우쳐서 우리에게 진리를 남겼다면 왜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 비해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할까? 옛 성인들이 수많은 말을 남겼지만 아무도 그것들을 실천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들이 과거 누군가의 논리이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지식을 갖춤으로 해서 지식을 활용하는 물질적인 풍요는 이룰 수 있었고 문명의 이기들로 인하여 지구가 1일 이동생활권이 되는 기술과 과학의 발전은 이룩하여 우리들의 삶은 편리해졌지만 못 사는 후진국에 비해 선진국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운용의 법칙’을 모르는 지식의 한계

인류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물질문명을 일으키기 위해 방대한 지식을 흡수하고 활용해 왔다. 그 결과로 지구촌은 1일 생활권이 되었고 삶은 비약적으로 편리해졌지만 물질적 에너지가 팽창하는 속도에 비해, 이를 바르게 운용할 수 있는 질 높은 정신적 가치(진리)를 채우는 속도는 상대적으로 뒤처지게 되었다. 외형은 커졌으나 내면의 공허함이 커지는 ‘질량의 불균형’이 발생함으로써 선진국일수록 물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성장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은 ‘생존’과 ‘기초적인 풍요’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다. 이 시기에는 물질적 결핍을 채우는 과정 자체가 동기부여가 된다. 그러나 이미 갖출 것을 다 갖춘 선진국 사회의 사람들은 다음 단계의 목표, 즉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때 불행을 느낀다. 과거의 논리는 '열심히 일해서 잘 살자'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는 갖춘 지식을 활용해 타인과 사회에 어떻게 보람 있게 쓰일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이 필요한데, 이를 찾지 못하면 지독한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기술과 과학의 발전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게 만들었다. 선진국 사회는 고도로 연결되어 있어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는 환경에 놓여 있다. SNS와 미디어는 상대적 박탈감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물리적 거리는 좁아졌지만, 사람 사이의 진정한 마음의 교류는 오히려 과거보다 약해지면서 고독한 현대인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것들이 진리가 아닌 누군가의 논리라면, 그 지식은 물질을 만드는 데는 유용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고 평화롭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지식을 활용해 물질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거꾸로 그 물질과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매월 지출하는 비용이 증가함으로써 사람이 희생되는 구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가 가진 지식과 에너지가 세상에 바르게 쓰여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홍익인간의 삶을 살 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인데, 선진국 사회는 아직 '소유'의 논리에서 '운용'의 진리로 넘어가지 못한 상태이다.


'질량의 법칙'과 '운용의 모순'

모든 고통은 내면의 질량이 환경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이를 지식인의 관점에서 검증하면 우리가 배운 지식은 과거의 '논리'였음을 인정하는가? 그 논리에 갇혀 상대를 무시하거나 내 고집을 부리지 않았는지 검증해야 한다. 내게 온 경제적 풍요나 지적 자산을 사회를 위해 흐르게 하지 않고 나만을 위해 가두어 두지는 않았는가? 고인 물은 썩듯, 정체된 에너지는 '아픔'이라는 신호로 나타난다.


자연은 우리에게 세 번의 기회를 준다. 1단계는 답답함이 일어나고 마음이 즐겁지 않고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단계로 내 생각의 오류를 점검할 시기이다. 2단계는 어려움 생기고 경제적 손실이나 인간관계의 갈등이 가시화되는 단계로 사회적 경고이다. 3단계는 고통이 찾아와 육신의 병이나 파산 등 감당하기 힘든 타격이 오는 단계로 멈추고 공부해야 할 마지막 신호이다.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순간,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환경, 정부, 부모, 혹은 상대를 원망하고 있는가? 남 탓을 10%만 해도 내 기운은 10%만큼 탁해지며, 100% 남 탓을 하면 모든 문이 닫힌다. 어려움을 푸는 유일한 열쇠는 '나' 중심에서 '타인과 사회' 중심으로 관점을 전환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나 공부의 목적이 '나의 먹고삶'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이웃을 이롭게 함'에 있는가? 하루 일과 중 영혼의 양식을 채우는 데 에너지를 얼마나 쓰고 있는가? 내면의 질량이 70%를 넘어서면 환경은 저절로 풀린다.


'물질 풍요와 정신 빈곤의 역설'

대자연은 수치와 법칙으로 운용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화를 내거나 남을 미워할 때 몸에서 독소가 나오고 기운이 탁해지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정법에서는 이것을 '영혼의 탁함이 육신을 치는 증거'로 본다. 모든 사고와 파괴는 진행률이 70%에 도달했을 때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잘 나가던 기업이 갑자기 무너지거나 건강하던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이미 내부에서 70%의 모순이 쌓여왔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선진국일수록 자살률과 우울증 빈도가 높은 현상은 물질이 답이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가 된다. 인류는 역사상 가장 많은 지식을 가졌으나 그 지식으로 서로를 비판하고 갈등한다. 이는 '갖춘 지식을 바르게 운용하는 법(진리)'을 모르면 그 지식이 오히려 자신을 치는 칼이 된다는 사회적 증거이기도 하다. 부의 편중으로 인해 사회적 에너지가 순환되지 않을 때 경제 공황이나 전쟁이 일어난다. 이는 홍익이념이 사라진 조직은 유지되지 못하고 해체되는 길로 간다는 사실이다.


우리 삶에서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인과관계로 누군가를 강하게 원망한 직후에 일이 꼬이거나 몸이 무거워지는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남 탓은 곧 나를 파괴하는 에너지'라는 법칙이 작동한 것이다. 또한 나에게 고통을 주는 인연은 사실 나의 모순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내가 변하지 않았을 때 똑같은 유형의 힘든 인연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은 대자연이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 실력을 갖추지 않고 요행을 바랄 때 반드시 사기를 당하거나 손재수가 생긴다. 이는 내 질량에 맞지 않는 에너지는 자연이 거두어간다는 자연의 법칙이 실현된 것이다.


인연과 거울의 법칙

"왜 내 질량보다 큰 문제가 오면 아픈가?" 인간의 영혼은 '에너지 체'이며, 이 에너지는 지식을 흡수함으로써 그 밀도(질량)가 커진다. 우리가 과거의 고착된 '논리'에 머물러 있으면 영혼의 질량은 성장을 멈춘다. 하지만 세상은 고도로 발전하여 처리해야 할 정보와 환경의 질량은 커졌다. 내 영혼의 질량(내공)은 30인데, 닥친 환경의 질량이 70이라면 그 차이만큼 압력(Stress)이 발생한다. 이 압력이 심해지면 정신적 답답함을 넘어 육신의 세포를 수축시키고 병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즉, 아픔은 내 질량을 키우라는 대자연의 독촉장이다.


"왜 많이 가졌는데도 힘들어지는가?" 물질과 지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흘러야 하는 에너지이다. 선진국이나 성공한 CEO들이 겪는 고통은 '내 것이라는 집착'에서 온다. 지식과 자원을 나를 위해서만 쌓아두고(소유), 이를 사회와 이웃을 위해 바르게 쓰지(운용) 못할 때 에너지는 정체된다. 대자연의 입장에서 에너지가 한 곳에 고여 썩는 것은 '자연의 법칙 위반'이다. 따라서 강제로 그 에너지를 해체하기 위해 '경제적 난관'이나 '구설수'라는 환경을 조성한다. 힘듦은 '너를 위해 살지 말고 타인을 위해 운용하라'는 방향 수정의 신호인 것이다.


"왜 나쁜 사람을 만나 고통받는가?" 모든 인연은 대자연이 보내준 '시험지'이자 내 상태를 비추는 '거울'이다. 내가 상대를 미워하거나 탓하는 것은, 상대가 왜 저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딪히면 그 기운은 탁해져서 나에게 돌아온다. 남 탓을 하면 내 영혼의 문이 닫히고, 자연의 보호막이 사라집니다. 이때 탁한 기운이 내 몸과 환경을 침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어려움은 내 안의 '모순(고집, 편견)'을 상대를 통해 발견하고 고치라는 교육적 장치이다.


운명론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모든 고통이 자신의 잘못이나 질량 부족 때문이라면, 이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불평등, 부조리)를 외면하고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가스라이팅'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아프거나 가난한 아이들의 고통도 본인 탓인가?"


정법은 단순히 개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어떤 환경이 힘든 게 아니라 거기에 단지 힘들어하고 있는 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각자 다른 환경(사주/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환경은 내 영혼이 이번 생에서 풀어야 할 '최적의 조건'이다. 사회적 모순 또한 그 시대를 사는 지식인들이 풀어야 할 공동의 숙제이므로 환경 탓만 하며 멈춰 있으면 고통은 지속되지만, 그 환경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일을 찾으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고통은 '책임 추궁'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인 것이다.


"선진국이 불행한 이유는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과 경제적 불확실성 때문이다. 정신적 가치만 강조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공염불 아닌가?"


물질문명은 인류의 70% 성장을 돕는 훌륭한 도구이다. 하지만 물질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이를 다루는 사람의 정신적 질량(진리)이 낮으면 방편에 휘둘리게 된다. 선진국의 불행은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넘치는 물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방향 상실'에서 온 것이다. 엔진(물질)은 커졌는데 핸들(정신)이 고장 난 격이다. 따라서 정신적 가치를 세우는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물질문명을 안전하게 운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 된다.


"착하게 살아도 불행하고, 악하게 살아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많다. 고통이 '법칙 위반의 결과'라는 주장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주관적 해석일 뿐이지 않는가?"


자연의 법칙은 즉각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개 30%, 70%의 임계점을 거치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악인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과거에 쌓아둔 에너지가 아직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에너지가 바닥나서 탁함이 70% 지점에 도달하면, 본인뿐만 아니라 자식이나 주변 환경을 통해 반드시 신호가 온다. '정법'적 검증은 단편적인 순간이 아니라 삶의 전체 궤적(인연, 건강, 경제, 자식)을 통합적으로 볼 때 비로소 그 과학적 정교함이 드러난다.


고통은 파멸의 징조가 아닌, 진화의 신호탄이다.

인류가 이룩한 찬란한 물질문명과 1일 생활권의 편리함은 우리에게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역설적으로 선진국일수록 행복지수는 낮아지고 삶은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을 자연의 법칙으로 검증한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은 물질을 일으키기 위한 ‘과거의 논리’였다. 물질은 완성되었으나 이를 운용할 정신적 질량(진리)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과 개인의 아픔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어렵고 힘들고 아픈' 상태는 재수 없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대자연이 3:7의 법칙에 의거하여, 우리가 가야 할 '홍익인간의 삶'에서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가장 자비롭고 정교한 경고이자 교육적 장치이다.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는 외부(사회, 타인)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내면의 모순을 바로잡는 데 있다. 남 탓을 멈추고 내 앞의 인연을 소중히 대하며 내 공부를 할 때, 탁했던 기운은 맑아지고 닫혔던 환경은 스스로 풀리게 된다.


지식인을 넘어 '운용자'의 삶으로

‘지식’을 ‘진리’로 업그레이드하라. 이제는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단계를 넘어, 대자연의 운용 원리를 통해 내 영혼의 질량을 키워야 한다. 내공이 차오르면 세상의 어떤 난제도 나를 아프게 할 수 없는 '분별력'이 생기게 된다.


소유의 삶에서 ‘보람의 삶’으로 전환하라 나의 경험을 통해 얻은 물질적 자산과 지식은 이제 나만의 것이 아니다. 이를 사회와 이웃을 위해 어떻게 바르게 쓸 것인가라는 '명분'을 세우고 내가 이웃에게 보람 있는 존재가 될 때, 자연은 그 삶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지원할 것이다.


기록하고 공유하는 '등불'이 되어라. 우리는 현재 진행 중인 삶의 활동은 통해 길을 잃고 아파하는 인류에게 "왜 아픈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시대적 등불이 되어야 한다.


"아픔은 멈추라는 신호이고, 공부는 나아가는 힘이며, 덕행은 완성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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