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재석 May 25. 2021

고통이 우리를 부를 때

전직 기자 미국 병원 채플린 생존기

협업 Collaboration 

병원 채플린은 때로 종교나 영적인 배경이 다른 환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요구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도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톨릭이나 루터교, 여호와의 증인, 제 칠 일 안식교, 무슬림이나 불교 신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종파에 속해 있는 채플린 방문을 요청합니다. 해당 종교의 채플린이 없을 때는 지역 종교단체를 섭외해 병원 방문을 주선하기도 합니다. 

2020년 2월, 

어린이 병동에서 여성 환자 가족이 가톨릭 신부님의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저희 병원은 가톨릭 채플린 (deacon) 자원 봉사자가 상주하지만, 평일 야간과 주말에는 주로 지역의 신부님들이 자원봉사를 하십니다. 이날은 주리 콜롬비아 지역 경찰서 채플린 봉사도 맡고 계시는 프란시스 신부가 와 주셨습니다. 


프란시스 신부님과 함께 병실에 들어가기 앞서, 간호사를 만났습니다. 환자의 이름과 일어난 일 등을 간략하게 들었습니다. 18 주된 아기를 유산한 여성 환자는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지만, 남편이 가톨릭이라 신부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간호사가 18주 된 영아를 보여줬습니다. 이동식 아기 바구니에 누운 아기는 이쁜 빵모자를 쓰고 하얀 데님 이불에 곱게 싸여 있습니다. 아기와 함께 간호사의 인도를 받아 병실에 들어섰습니다. 산모와 아기 아빠, 산모의 부모님과 여동생이 저희를 맞이합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찰나, 


아기 아빠가 웃으며 프란시스 신부님에게 친분을 나타냈습니다. 아기 아빠가 경찰관인데 경찰서 채플린 봉사를 하시는 프란시스 신부님을 뵌 적이 있다고 말입니다. 어색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깨기에 충분했습니다. 아기 아버지의 요청으로 프란시스 신부가 아기에게 세례를 주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아기 아빠와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아멘'으로 답했습니다. 


예식을 마치고 잠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병원 채플린으로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큰 고통 앞에서는 이야기하는 것조차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채플린의 상황판단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앞선 세례예식과 친분 덕분에 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누구보다 힘든 산모에게 애도를 표하고, 가능하다면 세례식을 마친 뒤 기분이 어떤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기를 안고 있던 산모가 잠시 아기를 바라보다가 저를 향해 입을 열었습니다. 속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부부는 아기를 갖기 위해 누구보다 애를 썼습니다. 근데, 저는 아기를 임신한 줄도 몰랐어요. 병원에 와서야 그 사실을 알았고... 아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슬픔으로... 너무 화가 나고...”

산모는 가족들 앞에서 오열했습니다. 가족들이 손을 얻고 아픔을 함께 합니다. 저 때문에 진정된 산모의 마음이 다시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까 두려운 탓이었을 겁니다. 잠시 뒤, 남편이 아내를 위로합니다. 

“누구도 당신을 탓하지 않아요.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하느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실 거야”

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남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순간, 아내의 흐느낌과 남편의 목소리가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눈물방울 사이로 아내를 바라봅니다. 아무것도 고칠 수 없고 위로할 수도 없는 무력감이 어김없이 밀려옵니다. 

‘하느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시겠지만, 종교성이 적은 이 산모에게 지금 그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용기를 내 산모에게 말했습니다. 

“자책감, 분노, 슬픔... 말씀하신 모든 감정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분간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시겠지만 이렇게 가족들의 지지을 받으면서 꾸준히 그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이시고, 표현하시면, 반드시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셔서 새 삶을 시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제 기도입니다.”

병실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프란시스 신부가 제게 함께 해 줘서 고맙다며 어깨를 쓰담쓰담, 

사실 전화로 병실만 알려 줘도 되는데 이날은 왠지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가톨릭 신부가 종교적인 예식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고, 채플린이 극심한 애도의 감정들 품고 있는 산모의 마음을 인정해주고... 슬프지만 의미 있는 방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방문이 산모와 그 가족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긴 애도의 과정 속에 하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작가의 이전글 고통이 우리를 부를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