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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석 May 23. 2021

고통이 우리를 부를 때

전직 기자 미국 병원 채플린 생존기

인식의 함정


살다 보면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일들이 대상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런 선입견과 그로 인한 내적인 판단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어서 이것 자체를 옳고 그르다고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에 선입견으로 부정적인 인상이나 감정을 가졌다가도 직접 대상을 경험하고 그 대상의 다른 면을 체험하고 알고 나면 부정적인 나의 평가가 바뀌고 그것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직접적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평가는 그렇게 굳어져 버리고 내 속에 편견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서론이 길어졌는데요, 병원에서 일하면서 저는 화내는 사람들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상대를 섣불리 판단하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일을 많이 고쳤다고 여겼는데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내면을 발견하게 돼서 반성 차원에서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2020년 6월 23일, 

중환자실 코로나 병동에서 일이 없어서 일반 중환자실 다른 환자들을 둘러봤습니다. 한 병실에서 환자의 아내로 보이는 여성이 인공호흡기를 하고 누워 있는 환자에게 조근조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가 하도 애처로워서 위로의 말을 전하려고 노크를 하려는 찰나, 반대편 병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치료받기 싫다니까, 어서 꺼리라고!"  순간 간호사가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을 직감하고 몸을 돌려 고성이 난 병실로 향했습니다. 


오른쪽 팔 아래위 두 곳에 아이비 포트를 주렁주렁 단 체로 환자는 침대에 누워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 전 이미 조폭 같은 짧은 머리에 팔뚝에는 문신을 한 모습에 그렇고 그런 사람이려니 생각하고 경비요원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씩씩거리는 환자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환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환자가 숨을 고르는 사이에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마크(가명) 씨, 힘들고 짜증 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하십니까?" 


"병원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조금 사그러들긴 했지만, 여전히 환자는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곧 담당 의사가 와서 궁금하신 부분을 이야기해 주실 겁니다." 이윽고, 레지던트 의사가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그동안의 처치와 왜 음식 공급을 중단했는지, 왜 퇴원이 금방 안되는지 등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가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아이스 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방으로 들어가 제 소개를 했습니다. 평소대로 설교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주러 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간호사와 의사가 나가고 저와 환자는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선천적인 뇌성마비로 두 다리를 쓰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잘 보살펴 주셔서 학교도 잘 다니고, 최근에 결혼도 해서 잘 살고 있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조폭이나 술과 마약을 즐기는 괴팍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제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갑자기 호흡곤란이 와서 병원에서 산소치료를 받느라 하루 동안 물은 물론이고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는데, 증상이 조금 나아지자마자 너무 배도 고프고 힘든데 간호사는 계속 주사기로 힘들게 해서 화가 나 폭발한 것이라고 털어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소개하며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의 화나는 마음과 장애인으로서 겪은 아픈 일들을 모두 주님께 올려드리며 평안을 간구했습니다. 


병실 밖으로 나와 간호사 리사를 만났습니다. 이 환자 말고도 다른 중환자를 돌보는 간호사가 좀 피곤해 보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환자의 화를 응대할 수 있었는지 묻자, 그녀는 웃으면서, "저 아이들 넷을 키우는 엄마예요. 화내며 고함을 지르는 것은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한다는 거죠. 행 거리...(angry + hungry)." 


또다른 일화는 제 개인사입니다. 

일주일 전 제가 자취하고 있는 아파트에 새로운 분이 들어왔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아저씨는 말도 어눌하고 손도 떨면서 거동 마처 불편해 보였습니다. 다른 중국인 친구가 전해준 말도 있어서 내심 걱정이 됐습니다. 


이사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처리할 일도 많은데 혹시 이 분 쓰러지시기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걱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튿날, 저의 걱정이 얼마나 편협한 저의 선입견에 의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장애인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집 청소와 장 봐주기 등 생활 전반적인 일을 도와주는 도우미가 계셨고, 제가 어질러놨던 욕실과 주방이 새로 입주한 이 아저씨 덕분에 새집같이 깔끔해졌습니다. 또, 전기, 수도세 등 이전해야 할 모든 유틸리티 관련 신고도 깔끔하게 다 해놓으셨더군요.


그리고, 다음 대목에서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최종 고지서가 나오면 계산하기 힘든데 자신의 명의로 이전을 시켰으니 자기가 다 내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건 아니다 싶어서 계산은 제가 할 테니 끝까지 셈을 잘 치르고 나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지난 한 주 혼자서 그릇된 선입견으로 상상하고, 단정하고, 걱정했던 제가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선입견은 누구나 다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인지적 반응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의해서 어떤 대상에 대한 느낌이나 감정적 호불호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을 더 경험하고 더 알고 나서 즉, 새로운 정보를 접한 뒤에 그 선입견을 바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면 그 선입견이 편견이라는 더 큰 늪으로 변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인생을 산다는 것이 내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세상과 자연, 이 우주에 대한 선입견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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