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라고 쓰고 여행이라고 읽기

by 콩밥

우리 연구실은 석사과정 3명, 박사과정 5명으로 구성된 작은 연구실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의 역피라미드 인구 구조와 똑 닮았다. 8은 무리가 크게 나뉘지 않는 적당한 숫자인 듯해서 딱 좋다. 지난주에는 모두 제주도에서 열린 국내 학회에 다녀왔다. 나는 학회 논문 제출 기간 동안 논문자격시험을 치렀다는 핑계를 앞세워 논문을 늦게 제출했다. 사무국에서는 이미 시간표 편성이 끝났다며 단칼에 거절하셨고 나도 옳타구나 넙죽 납득하였기에 이번 학회는 학회라고 쓰고 여행이라고 읽는 달디 단 학회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발표장에 우르르 몰려가 물개 박수를 쳐주고, 각자 관심 있는 발표를 골라 듣고, 후닥닥 빠져나와 도로를 달렸다. 딱히 어디에 가야겠다는 목적지 없이 무작정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배가 고파지면 야무지게 먹고, 아무데서나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아무래도 나는 흔히 말하는 아싸 중의 인싸인 듯하다. 집순이지만 어디론가 실려가고 싶고, 대화에 열심히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 사이에 끼여서 낄낄대고 싶으므로, 2010년대 가요를 크게 틀어놓고 달리는 9인승 차에 몸을 맡겼다. 잘 노는 후배들 사이에 끼여서 순간순간 스쳐가는 창밖을 보며 청승맞게 감상에 빠졌다가 피곤하면 조금 졸았다가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에 깨서는 웬 슈슉, 슉 돌하르방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마냥 놀기만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범생이여서 발표를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덜고자 속죄하는 마음으로 발표를 들었다. 듣고 싶은 발표를 팸플릿을 꼬깃꼬깃 접어 표시해놓고 빡빡하게 쫓아다니며 들었다. 전에는 발표가 끝나면 긴장이 탁 풀려서는 남의 발표는 보지도 않고 바로 도망쳐서 몰랐는데, 발표 퀄리티가 생각보다 높고 신선한 주제도 많았다. 전체적으로 어떤 트렌드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탄소 중립, 친환경, 인공지능을 다루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욜로니 뭐니 다들 인생을 즐기는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참으로 치열하게 살고 있구나 싶고, 나도 뒤쳐져서는 안 되겠다는 옅은 불안과 약간의 의욕을 얻은 시간이었다.


연구실 후배들 발표를 들을 때는 자꾸 배실배실 웃음이 났다. 다들 열심히이기도 하고, 긴장한 모습도 역력한데, 사람들이 공격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피해 가며 디스커션을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좋다는 말 말고는 표현이 안된다. 팬클럽이라도 하나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교수님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교수님께서 우리를 방목하며 키우시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나름 건재하다는 걸 보여준 것 같아 내심 뿌듯하면서도, 화려한 발표들 앞에서는 부러움과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도 느꼈다.


연구를 하면 조금 외롭다. 옆 사람과 주제가 겹치지 않아 경쟁관계가 되지 않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건 어떤 직업이든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무언가를 잘 알고, 거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쏟아야만 한다. 그 와중에 대체되기 쉬운 부품이 아님을 피력하기 위해 자신만의 기술 혹은 전문 분야도 개발해야 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왜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끊임없이 증명해보여야 한다.


나에게 학회는 조금은 외로운 사람들이 잠시 책상과 실험실에서 벗어나 자신을 동류에 내보이는 자리, 조금의 부러움과 동경, 약간의 소속감과 안도를 느낄 수 있는 자리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만나는 연구실 사람들과 마음이 잘 맞고, 같은 연구를 하는 사람들, 교수님들이 의욕적이고 배울 점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어디서 무얼 하든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있다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날 보고 너무 감성적이라고 하신대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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