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한두 명만이 남아 자습실의 짐을 정리하는 둔탁한 소리가 칸막이 너머로 간간이 들려왔다. 매일 밤 궁둥이를 붙이고 무언가를 빼곡하게 써 내려가던 학생들이 빠져나간 공간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원섭섭한 감정이 밀려왔다. 회전의자에 앉아 발로 땅을 밀며 느리게 빙글 돌았다. 이 장면들을 휴대폰이 아닌 내 마음에 저장하고 싶어 조리개를 여닫듯 눈을 천천히 깜박여보았다.
마음이 쉴 새 없이 과거와 미래를 오가다가도 종종 현재에 머무르게 될 때면,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공간의 모습, 소리, 온도와 습도를 기억하고 싶어지고, 눈을 깜박였던 그때처럼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공간을 떠올려보려 해도 희미한 잔상만이 남았다. 오히려 그 시간을 붙들어두고 싶었던 마음만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작년 10월에 홍콩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곳은 푹푹 찌는 여름이었다. 시나브로 시간은 흘러 쌀쌀했던 겨울을 지나 어느덧 봄, 아니 초여름에 접어드는 듯하다. 홍콩이공대학의 토목학과 건물은 본 캠퍼스와는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매일 아침 습습한 공기를 느끼며 너른 나무 데크가 깔려있는 육교를 건너야 한다. 같은 장면이지만 유달리 따뜻해진 날씨는 작년과, 그 재작년 서울에서의 봄을 떠올리게 하고 나도 모르게 천천히 눈을 깜박이게 되는 것이다.
다소 들뜨는 기분은 근 몇 년간 겨울마다 찾아오는 경미한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신호이다. 미묘하게 더 의욕적이고 세심하게 논문에 하나의 단어, 문장, 단락을 짜맞추는 것이 즐거워지는 나날이다. 조만간 사소한 충격에도 이 몽글거림은 터질지 모른다. 사소한 변화는 쉼없이 흐르는 시간을 깨닫게 하고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인다. 그럼에도 그 영속성에 질식할 것만 같은 아찔함이 왜인지 싫지만은 않은 홍콩의 출근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