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에는 실험실 요정이 살고 있어서, 자주 얼굴을 비추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종 빅 엿을 날린다. 예를 들어 멀쩡했던 믹서 날이 갑자기 헛돌면서 잘 빠지지도 않는다든지, 시편을 다 만들어가는데 그제야 계산해온 결과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든지, 갑자기 에어컨 펌프가 고장 나서 실험실이 물바다가 되어버린다든지. 그렇게 수십 분을 허비하고 나면 진이 쏙 빠져서 그만 집에 가고 싶어져 버리는 것이다.
고약한 요정님의 비위를 살살 달래기 위해 요 며칠 꼬박꼬박 실험실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예상했던 쓸만한 결과를 조금 건지고 있다. 내 나름대로 정해놓은 학위논문 마감일은 8월 31일, 이제 딱 43일이 남았다. 앞서 졸업한 선배들의 논문들을 대충 넘겨보니 적으면 150쪽, 많으면 250쪽, 가끔 괴물같이 400쪽씩 쓴 사람도 있지만 그건 이상치로 보고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200쪽이니 목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00쪽이다. 대충 셈해보면 하루에 다섯 장씩 쓰면 졸업이란 걸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계획에 여유 시간은 없기 때문에 실험에 더 이상의 시행착오는 있어서는 아니된다….
남의 논문을 읽다 보면, 헉 하고 숨을 삼키게 되기도 하는데, 내가 오랫동안 고민하던 문제의 실마리를 줄 때가 그렇다. 거기서 제시하는 새로운 방법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만 같지만, 막상 시도해보면 내 재료와는 맞지 않거나, 장비 스펙이 미묘하게 다르다거나, 아무튼 쉽게 해결되는 경우는 맹세코 거의 없다.
몇 달 전에 a라는 방법을 시도했을 때는 분명 결과가 신통치 않았는데, 이번에 혹시나 하고 큐벳
(시료를 담는 용기) 재질을 바꾸어보았다. 그런데 원했던 결과가 대충 나와주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눈물을 머금고 날렸던 챕터 하나를 되살리고 일주일 넘게 답장을 기다리셨을 교수님께 연구 진행 상황을 보낼 수 있었다.
인생이 참으로 오묘한 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예상치 못한 때에 온다. 나 같은 P형 (MBTI) 인간은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확증 편향에 빠진다. 거 봐, 이래서 계획이 큰 의미가 없어,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이건 계획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실 과거의 내가 그 지식을 머리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체득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충분한 삽질을 한 후에야 몸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니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뚝딱 되는 건 없다는 걸 또다시 새롭게 느끼는 요즘, 실험실 요정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므로, 오랜만의 쾌감을 잠시만 즐기되 너무 자신만만하지 않고 앞으로 있을 시련을 대비해야겠다.
역시.. 조금 자만했던 탓인지 일요일에 증류수 통에 이소프로필알콜이 담긴 줄 모르고 시편을 만들어서 6시간을 날려버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