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서울 밤은 적당히 습하고 선선한 듯 포근하다. 고무장갑을 끼고 슬리퍼를 끌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잠시 벤치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았다.
어제는 콘크리트를 몇백 킬로 비비고 믹서랑 펌프를 세척하는 그런 일을 하고 난 뒤라 몸이 고단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식빵을 굽고 잼을 슥슥 발라 두 조각을 먹어치웠다. 콩이 엉덩이를 베고 가만히 누워 생각을 하다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이번 주에 이틀은 콘크리트를 3d 프린팅 해보겠다고 후배를 세 명이나 대동하여 일산에 있는 실험실로 출근했다. 우리가 하고 있는 3d 프린팅은 3-dimensional 프린팅이 아니고, 3D (dirty, difficult, dangerous) 프린팅이다. 이틀 동안 실험했지만 논문에 쓸만한 결과는 얼마 못 건졌다. 다다음주에도 추가 실험을 해야하지만 그나마 위안 삼을만한 것은 지금까지 웬만한 시행착오는 겪을만큼 겪었다는 점이다.
어제는 나에게 주어진 젊음을 어찌할 줄 모르고 마구잡이로 태워버리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슬펐다. 콘크리트 프린팅은 졸업 논문과 관련은 없지만 오랫동안 공부한 주제라 애착이 있어서 다른 후배에게 열심히 알려주고 있다. 이번 주말부터는 가르치고 있는 중고딩들의 기말고사 준비가 시작된다. 데이터 정리를 하려고 앉았는데 왜 이놈들은 내일 있을 영어 수행 작문을 전날 밤에 보내서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인지. 그렇다고 이제 마음 잡고 공부하려는 아이를 모른 체할 수 없어 공을 들여 수정할 부분을 짚어주었다. 오늘은 특허 관련해서 미팅을 했고, 데이터는 얻었으니 얼추 마무리해서 제안서를 작성하면 된다. 나름대로 정해놓은 졸업 논문 기한까지는 80일 정도 남았으니 매일 세 쪽씩 꼬박꼬박 쓰는 기적을 행하여 어떻게 250쪽 정도 만들어 내면 된다.
처음에는 이 상황들이 객관적으로 절망스러웠다. 오랜만에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려볼까 싶었지만 예전처럼 쉽게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얼마전부터 나의 감정과 약간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하고 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졸업을 다음 학기에 못한다고 세상이 아주 끝날 것도 아니다. 졸업을 못했을 때 최악의 상황들이라고 해봐야, 연구 과제가 별로 없어서 하고 싶은 실험을 마음껏 할 수 없고, 하도 주변에 졸업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녀서 조금 민망하고 창피할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실험을 아예 못할 것도 아닌 것이,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발품을 팔면 또 방법은 찾아지기 마련이다.
길게 보면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귀여운 아들 딸도 낳을 것이고 멀지 않은 미래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여행도 다녀올 것이다. 몇 년 내로 독립도 해야 하고 나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테니 지금보다 나은 밥벌이를 할 수 있을 테다. 엄마도 일을 줄이고 일주일에 이틀은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려는 길을 앞서 걸어가고 있는 대단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이 좋은 이정표이긴 하지만 그 방향과 속도가 옳은 것이라고 믿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삶이 기대했던 것처럼 쉽게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들을 시간도 있는 걸 보니 하루가 참 길다는 것이 희망적인 부분이다. 인생은 적어도 이에 만 곱절은 되니까 무엇인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조금은 여유를 부려보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