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니, 얼마 전 만난 친구가 물었다. 행복하지, 하고 잠깐 뜸을 들였다가 행복하긴 해,라고 덧붙였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행복하긴 해, 그런데 괜찮지는 않아, 였다. 며칠 전에는 소처럼 샐러드를 우걱우걱 먹다가 연구실 후배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매일매일이 참 새롭고 권태롭다, 그치.” 실은 권태보다는 새로움에 방점을 두고 싶었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나날에 대해 불평을 하려던 것이라기보다는 권태로움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행복이 참 새삼스럽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행복하긴 해, 그런데 괜찮지는 않아”와 “매일매일이 참 새롭고 권태롭다”는 얼핏 보면 전혀 다른 문장이지만, 나에게 이 둘은 서로 닿아있는 표현이다. 요즘 삶이 멈춤 버튼 없이 굴러가는 쳇바퀴 같아서, 쉼 없이 움직이지만 영원히 제자리에 멈춰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지겹게 반복되는 나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어서, 미워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
아침 일곱 시 반, 나는 오래 묵은 대학원생들이 살기 위해 모여드는 헬스장에 간다. 세 개의 매트 중 무조건 가장 안쪽 매트에서 매일 다른 근육들을 다채롭게 괴롭혀주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더 무거운 덤벨을 들거나 지난 주보다 더 많은 횟수를 기록하고 나면 '이런 정신력이라면 오늘 할 실험엔 시행착오라곤 없을 것이며, 논문도 술술 잘 써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난다. 그런 날에는 일주일에 두 번 배송되는, 그래서 매일 아침 점심으로 부지런히 먹어치워야 하는 채소도 처음 먹는 것처럼 맛있다.
일주일에 50시간 남짓 앉아있는 연구실 내 자리도 좋아한다. 책으로 빽빽한 두 개의 책장, 널찍한 책상에 모니터 두 대, 구석에는 레깅스와 스포츠 브라가 널려있고 오뚜기밥과 두유 따위가 쌓여있다. 진리를 따져보는 연구 공간이라기보다는 자취방의 축소판에 가깝지만, 둘도 없는 오롯이 나를 위한 공간이다. 여기서 어제 쓰던 논문을 오늘도 붙잡고 끙끙 댄다. 이 논문은 꼬박 일 년 반 동안 세 번 퇴짜를 맞아서, 환골탈태를 거듭하는 중이다. 또 다른 논문은 한 문단만 일주일째 고치고 있다. 세심하게 단어를 골라 문장을 쌓았다가, 머리를 싸매며 문단을 통으로 허물었다가 하다 보면 영원히 논문 투고도, 졸업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아득해진다. 그럴 때면 그 좁은 공간이 내 가슴속에 꽉 들어찬다.
평일 이틀, 주말 하루는 엄마 학원에서 중고등학생을 가르친다. 두 눈이 반짝이는 장난기로 가득한, 그렇지만 두뇌는 언제 움틀지 모르는 깜깜한 씨앗 같은 아이들이다. 설명을 하고 뒤돌아서면 다른 친구가 같은 질문을 한다. 설명을 녹음해두었다 재생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또 다른 학생이 똑같은 질문을 하고, 나도 모르게 크게 심호흡을 하게 된다. 그렇게 돌림 노래를 몇 시간 부르고 나면 나중에는 배에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질 않아 목으로 꽥꽥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면 엄마와 함께 퇴근하면서 누구는 아직도 덧셈, 곱셈을 틀려, 누구는 방정식을 못 세워,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해 비슷한 푸념들을 나눈다. 현관문 앞에는 반려견 콩이가 가만히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콩이 산책 갈까? 하는 말에 귀를 번쩍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꼬리를 붕붕 흔드는 조그만 생명체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생명력을 끌어모아 산책을 다녀오고, 그릇을 정리하고, 요일에 맞춰 분리수거를 하고, 마른빨래를 개켜 넣고, 바닥을 닦는다.
토요일 저녁부터 화요일 아침까지 엄마는 부재중이다. 제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생을 보러 내려가시기 때문이다. 아빠는 엄마와 갈라선 후 큰아빠 댁 옆으로 귀농하셨기에 서울에는 나와 콩이뿐이다. 혼자 있는 건 싫으니, 일요일 아침에는 학생 몇 명이랑 달리기를 한다. 일요일 저녁에는 두어 시간 학원 청소를 해줘야 한다. 집에는 일주일간 밀린 빨래가 있고 콩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샤워란 걸 해줘야 한다. <모모>에 나오는 나이 든 청소부 베포처럼, 쓸고, 한 숨을 쉬고, 닦고, 다시 숨을 쉰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평화는 달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지 화면처럼 느껴져서 그 영속되는 느낌에 질식할 것만 같다. 반복되는 일상은 안정적이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균형을 잃고 휘청일 수도 있다. 가끔은 소리 내어 울 힘도 남아있지 않고, 너무 지쳤다는 생각만 짙게 남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마음껏 탓하고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 그렇다고 나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으니, 차라리 무엇이든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에게 사랑하는 것은 모르는 척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불편하고 의지가 필요하다. 숨 쉬듯 자연스럽지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단서가 붙는다. 매일 7시간을 아이들과 아웅다웅한 엄마에게 아무 힘도 남아있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청소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엄마의 몫이 된다는 것을 안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답답함을, 어떤 아이는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어떤 집은 이혼했다는 것도 안다. 예전에는 모르는 척 미워하고 분노했지만, 결국은 그런 내가 미워진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고단함이 있고, 그럼에도 서로에게 무엇인가 끊임없이 내어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사소한 순간들에서 희미한 행복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가령, 엄마가 무슨 바람에서인지 플라잉 요가를 시작해서, 요가가 너무 개운하고 좋다며, 복근이 당긴다고 재잘거릴 때가 그렇다. 어떤 학생이 살을 빼고 여사친에게 고백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나에게 물어볼 때가 그렇다. 아침에 나에게 엉덩이를 붙이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콩이를 가만히 쓰다듬을 때가 그렇다. 일 년 전 도무지 이해를 못해서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논문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결과를 담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아버렸을 때가 그렇다. 그런 순간들은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르고, 끊임없이 무엇인가 변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속삭이는 순간들이다. 콩이도 엄마도 아빠도 조금씩 늙어간다. 엄마가 먹는 알약의 가짓수는 하나가 늘었다가 줄었다가 한다. 아빠가 키우는 작물의 수와 아빠와 만나지 못한 날들은 계속 늘어난다. 마냥 아기 같았던 초등학생들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어느덧 자기들끼리 나의 결혼을 염려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행복의 흔적을 기민하게 쫓으려면, 나에게는 반복적인 일상이 필요하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 그러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머리로 알고 있더라도,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를 제 시각에 재우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운동을 시켜준다. 그러면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희미하고, 오늘과 비슷한 내일이 이어지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