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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Mar 26. 2017

나는 피아노가 싫다

엄마와 피아노 

나는 피아노를 무척 싫어한다.


어느 정도로 싫어하냐면 6살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를 14살,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을 때 (=엄마의 품을 떠났을 때)부터 손도 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피아노를 배우는 과정은 부드러운 선율과는 반대로 너무나 혹독했다.

여섯 살 때부터 체르니 20~40 (번호도 가물가물하다)에 수록되어 있는 곡들을 매일 몇 십번씩 연습해야 했다. 연습 표기를 위해 마련된 노트북에는 항상 채워진 동그라미보다 덩그러니 비어져 있는 동그라미들이 많았다. 


머리가 더 클수록 몰래 동그라미를 채워 넣는 용감함을 배웠고 그 대가로 손을 나무로 벌겋게 될 때까지 맞거나 한 번은 심지어 홀딱 발가벗겨져서 집 밖으로 쫓겨났다가 동네 아줌마들이 사정사정해서 돌아올 수 있었다.




엄마는 어릴 적 피아노를 무척 치고 싶었다고 하신다. 


내가 연습을 게을리할 때 가끔 흘리듯이 말해주곤 하셨다.

하지만 감히 꿈도 못 꿨다고 하셨다. 전라북도 출신의 육 남매 중 막내로서는 매우 버거운 꿈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충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여섯 살이 되자마자 동네 백화점에서 제일 비싼 피아노를 엄마는 덜컥 구입하셨다. 그 피아노를 엄마는 애지중지 마른 걸레로 매일 닦으셨다.




고등학교 여름 방학 때였다. 엄마와 대화 중 방구석에서 먼지를 덮어쓴 채 조용히 앉아있던 피아노를 물끄러미 쳐다보었다.


"저건 언제 팔 거야? 나는 절대 칠일 없어. 지긋지긋해"

엄마의 심기를 박박 긁고 싶은 사춘기 소녀답게 최대한 스타카토 (staccato) 같이 짧고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네가 계속 피아노를 쳤으면 좋겠어..."

엄마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고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오늘, 싱가포르 National Gallery에서 피아노 연주회가 있었다.



전시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피아노를 오랜만에 멀리서 마주했다. 



멀리서 마주한 피아노는 아름다웠다.


잘빠진 다리와 매혹적인 레드, 그리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8분짜리의 곡을 악보 없이 눈을 감고 연주하는 어린아이들이 그 피아노의 존재를 완성시켰다.


안경을 쓰고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연주를 하는데 문득 기억 속의 내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슬펐다.


만약, 정말 만약에,


6살인 내게 피아노를 강요하기보다

엄마가 스스로 꿈을 이루기 위해 피아노의 건반을 배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까지 왔던 엄마의 찰랑대던 검은색 머리와 허리에 착 감긴 청바지가 갈색 피아노와 참 잘 어울렸을 것 같다. 그리고 피아노를 동경했고 사랑했던 엄마가 연주를 했으니 분위기와 선율도 아마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봤다면 나도 피아노와 정약 결혼 대신 서서히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어른이 된 나는 나의 소위 '피아노 기피증'을 좀 더 다방면으로 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극성 한국 엄마'의 탓으로 치부하며 엄마를 원망했지만 이 기피증의 시초와 결말은 사실 훨씬 복잡하다.


서울에서 살면서 경기도에 위치한 중, 고등학교로 출퇴근한 선생님인 엄마의 퇴근시간은 이르면 7시, 늦으면 밤 11시, 심지어 12시였다. 고등학생들과 야자를 함께 버텼고 회식자리는 술을 못 마셔도 꾸역꾸역 참석했다.


몇십 년이 지나서 드디어 피아노를 샀지만 평범한 대한민국 직장인인 엄마에게 피아노는 그림의 떡이었다는 것을 요즘 실감한다. 회식자리는 눈치껏 빼봤자 그래도 어느 정도 참석해서 흥을 맞춰줘야 했을 것이다. 고등학생을 담당했을 때 야자는 필수였을 것이다. 왕복 2~3시간인 통근길 때문에 집에 오면 피아노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집에서 반찬 투정하는 두 아이를 위해 반찬과 밥을 해야 했을 것이다. 아빠의 양복을 다림질하고 집안을 청소하면 아마 바로 스르르 잠에 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피아노를 치고 싶었나 보다. 눈으로라도 나를 통해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고 귀로 선율을 음미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나를 닥달했나보다. 눈과 귀로라도 피아노를 느끼고 싶어서. 




엄마는 내가 대학교를 가고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셨다.

가끔 녹음도 해서 보내주신다.


나를 통한 간접적 사랑보다 혼자 건반을 두드리면서 손가락도 꼬여보고 무거운 페달도 밟아보면서 피아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아, 나는 피아노를 아직도 싫어한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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