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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Aug 02. 2018

하지만 행복하세요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의 열정과 눈물

스무 살 초반의 앳된 얼굴을 가진 그녀가 유난히 쌍꺼풀이 짙은 눈을 껌벅이자 눈물이 방울방울 쏟아져 나왔다. “너무 절실해요… 너무…” 그녀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하는 바람에 나는 ‘절실’을 어떻게 통역할지 머리가 새하얘졌다.  


“Really want”는 소망을 이루자 하는 원함의 무게가 가벼워 보였고 “Desperate”은 기약 없이 매달린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절실’하게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다. 경찰서 바닥이라도 청소하는 게 꿈이라고도 했다.  


지난 열흘간 나는 싱가포르 국영방송국 팀과 절실하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한국 청년 네 명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했다.   





6월 말쯤 예전에 싱가포르에서 같이 일했던 피디가 한국에서 취재와 촬영을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피디는 너무 뻔한 한국의 ‘성형 문화’나 외신에서 이미 백번 정도 다룬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 (death school)’를 하고 싶어 했는데 나는 좀 더 사회성이 있는 주제를 찍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의 공무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주제를 피디에게 제안했다.


나는 공무원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한 번도 공무원을 매력적인 직업이라 느껴본 적이 없다. ‘철밥통’이라 떠들어대는 언론의 보도와는 상반되게 매일 새벽 6시에 출근했던 아빠와 집에까지 일을 가져와서 밤새 일했던 엄마를 보며 절대 공무원이 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하지만 부모님 덕분에 공무원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은 높다고 생각해서 이 주제를 선택하기도 했다 (취재 후 돌이켜보니 나는 공무원 시험과 조직에 대해 모르는 부분과 선입견이 많았다....)




다큐멘터리를 위한 취재는 공무원 학원의 메카 노량진에서 시작했다.



생각 없이 뛰어들었던 노량진 취재는 내가 지금까지 했던 취재 중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학생 섭외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사람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가고 관계를 쌓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정석이다. 일본 방송국 NHK는 몇 개월에 걸쳐 학생들을 알아가며 시험 준비 기간부터 결과까지 촬영했다고 한다. 한데 이 쉬운 공식을 짧은 호흡의 영어 기사를 뽑아내는 일에만 익숙한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노량진과 종로에 위치한 학원 열네 곳이 넘게 전화를 하고 이메일을 보냈지만 한 곳에서만 연락이 왔다. 학원을 통해 학생 한 명을 어렵게 섭외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공부에만 매달려 있는 학생에게 연락을 취하는 일은 어려웠다. 드문드문 오는 한두 마디의 답장 때문에 사전 조사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취재 허락을 받고 스케줄 상의와 협조를 위해 학원 담당자에게 보낸 열몇 통의 문자와 전화에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한 달 가까이의 사전 조사가 마무리될 때쯤 싱가포르에서 카메라맨 두 명과 피디 Jenn 이 도착했다. 내가 싱가포르에서 일을 했을 때 따뜻하게 대해 주셨던 분이라 나도 이번에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촬영은 순조롭지 않았다. 담당자는 휴가를 가면서 학원에 근무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가 촬영을 온다고 말하지 않았다. 회신받은 이메일과 문자를 보여줬지만 카운터에 앉아있던 학원 담당자는 우리에게 경비를 보내 재차 확인을 거듭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강의실 뒤에서 조용히 촬영을 하고 싶었지만 선생님들은 차가운 표정으로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 옆을 지나갔는데 간혹 찌푸린 얼굴로 불쾌함을 표시하는 학생도 있었다.

인터뷰할 학생에게 오늘 단어 시험은 어땠냐고 물어봤다. “못 봤는데요?” 학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 시험이 어려웠나봐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신경이 쓰여서 시험을 못 봤다고 했다. 그는 몇 초마다 반복적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우리도 나름 신경 쓴다고 쉬는 시간 때 1~2분 정도 인터뷰를 했지만 학생에게는 그 시간도 아까웠 나보다. 학생들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공부했기 때문에 인터뷰를 하자고 물어보는 일은 내게 고역이었다. 인터뷰한 네 명 모두 하루에 12-13시간씩 공부를 한다고 했다.  




첫 번째로 인터뷰한 학생의 보금자리는 노량진 한 골목에 위치했다. 좁은 골목을 휘감은 전깃줄과 주황색 불빛 아래 학생은 재빠른 걸음으로 우리를 고시텔로 안내했다.


어두워서 사진을 못 찍은 관계로 구글 street view로 대체 (고시텔 주변 사진)


아예 방음이 안 되는 벽 때문에 촬영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카메라맨 한 명이 따라 올라가 학생 방에 GoPro 카메라를 설치하고 내려왔다. 학생이 취침과 기상할 때만 카메라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촬영이 되었다. 나중에 촬영된 영상을 보니 학생의 침대와 벽 사이에는 곧게 뻗은 팔 반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방은 20평대 아파트의 화장실보다 비좁았고 창문은 없었다. 거주자들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고 코 고는 소리는 고스란히 벽을 통해 옆 방에 전달된다고 했다. 고시텔은 ‘관 (Coffin)’ 만큼 좁은 악명 높은 홍콩의 Coffin house을 연상시켰다.  


홍콩의 Coffin House (출처: The Guardian)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들의 일상은 타인이 관리하고 지배했다. 첫 번째 학원에서는 조교가 문을 지키며 지정된 시간 이후 화장실을 가는 학생에게 벌점을 부여했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벌점이 쌓이면 퇴출이 된다. 노량진 촬영 후 방문한 안동의 기숙학원도 비슷했다.  



400명 정도가 있는 안동학원의 하루는 7시 30분 점호로 시작된다. 군대 출신 사감은 굵고 낮은 목소리로 “기상, 기상, 기상”을 반복했다. 학생들은 재빨리 문 앞에 집합하여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앉았다 일어섰다.  


실제 점호 전경


인터뷰했던 남학생에게 이런 강제적인 규율이 익숙한지 물어보았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 익숙하지 않을까요? 고등학교 때도 11시까지 강제로 야자하고 군대도 다녀왔으니까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학원은 “4 無 정책”을 도입하여 핸드폰 사용과 이성 교제, 게임 그리고 유흥을 금지한다.


 


하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기숙학원 학생들이 “4 無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호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엄격한 규율과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방해 없이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학원에 따르면 90% 정도가 자발적으로 입교했고 부모님의 손에 끌려서 온 학생은 곧 자발적으로 나간다고 했다. “간혹 시험을 앞두고 긴장을 못 이겨서 도망가는 경우도 있어요, 근데 얼마 안 돼서 돌아와요. 돈도 없고, 어디를 가겠어요?” 학원 관계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몇 년 전에 폐교한 한 대학교의 부지에 위치한 학원의 주변에는 시골 농가 몇 개와 산이 둘러싸고 있다.  




올해 4월에 실시된 9급 공무원 시험에 200,000 남짓의 수험생들이 응시하였고 그중 5,000 명 남짓이 합격한다고 보도되었다. 1:40의 경쟁률이다. 특정 공무원 직종의 경쟁률은 1:100까지 올라간다. 우리가 인터뷰한 교수는 젊은이들이 ‘마음가짐’을 바꾸고 눈을 낮춰서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에 들어가라고 했다.  


“중소기업의 열악한 처우와 환경을 아시잖아요. 대기업이 학력과 시험 점수를 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리 경력을 쌓아도 사다리 위로 올라갈 수 없어요. 그래서 공무원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순간 감정에 이끌려 인터뷰한 이들을 대변하는 심정으로 나는 되물었다.


그는 꼬이도록 꼬인 이 시스템에 대안이 없다는 비관적인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책 <당선, 합격, 계급>의 저자 장강명은

한국 취업 시장 곳곳의 내부 사다리가 허약하다고 썼다.


그는 공중파 방송사 공채에 도전하는 아나운서를 예로 들었다. 공중파 3사의 아나운서 경쟁률은 기본적으로 1500대 1 정도이다. 그중 현역 지역 방송 /스포츠 채널 아나운서도 많다. 그는 지상파 공채에 이미 타 사에서 경력이 있는 아나운서들이 지원서를 대거로 내는 이유가 언론 업계의 내부 사다리가 허약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리 지방 방송에서 경력을 쌓고 노력을 해도 공중파 아나운서만큼 대우나 임금을 받을 수 없고 업계에서 성공하려면 처음부터 공중파 아나운서로 시작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외신에서 일을 하며 경력을 쌓고 한국에 돌아온 내게도 이 규칙은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한 종편 방송사의 사장은 내가 아무리 외신에 기사를 기고했어도 한국 매체에서 일하려면 무조건 입사 시험을 봐서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박문각 시사 상식’ 같은 책에서 나온 상식을 얼마나 많이 외울 수 있는지 판단하는 언론사 시험으로 기자를 뽑는다. “로제타 플랜 (Rosetta Plan)이 무엇인가” 하는, 세계 최고 스피드의 인터넷을 통해 바로 알 수 있는 질문에 답을 못했다는 이유로 많은 지원자들이 1차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큰 변수가 없는 한 뽑힌 기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임금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참고로 미국에서 기자들은 대부분 지방 방송국/ 언론사에서 시작해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은 후 실력이 갖춰지면 대형 미디어로 이직한다. 외신 기자들은 항상 내게 이력서 맨 위에 학력을 쓰지 말고 본인의 경력부터 쓰라고 조언했다.


미국에서 ‘한방’으로 결정되는 일은 복권 당첨뿐이다.  





가끔 일이 힘들다고 징징댄 내가 부끄러울 만큼 이번에 인터뷰한 20대 초, 중반의 학생들은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뮤지컬에 전념하느라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여학생은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한 남학생은 경찰 시험을 4년간 준비했는데 아쉽게 고배를 마신 후 슬럼프가 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경비와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뛰며 돈을 벌었는데 음식점에 밥을 먹으러 온 경찰들을 볼 때마다 “패배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매일 밤 촬영을 마치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고통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이 되었다.


1초도 아껴가며 공부하는 그들에게 짧은 인터뷰를 부탁할 때마다 너무 미안했고 수십 명이 있는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신문 밖에서 접한 노량진이란 세계는 세상 모든 곳의 좌절과 불안, 불공평함, 그리고 두려움이 가득한 곳 같았다.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영어 선생님은 우리에게 노량진의 선생님들이 “teaching machine (가르치는 기계),” 그리고 휴가도 맘대로 못가는 “slave (노예)”라고  소리 높여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예쁘게 포토샵이 된 그녀의 얼굴이 다른 선생님들의 포스터와 함께 걸려있었다. “왜 한 나라의 공무원을 뽑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모든 촬영을 끝마치고 뒤풀이를 하는데 Jenn의 친구가 왔다.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피디를 하는 40대 여성분이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나의 고충을 토로했다. “인터뷰를 할 때 상대방의 감정이 제게 너무 고스란히 전달되어서 너무 힘드네요.” 노량진과 안동에서 몰래 몇 번 울었다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주원 씨 그러면 이 일 오래 못해. 감정을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 느끼고 행동하는 일은 동물들이 하는 일이야. 우리는 사람이니까 그 감정에 대해 오랜 시간 곱씹으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켜던 그녀는 갑자기 고 노회찬 의원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대답을 하니 그녀는 갑자기 팔에 얼굴을 묻고 서글프게 펑펑 울었다. 촬영을 할 때 본인 감정에 냉정 해지라면서 술자리 대화 내내 세상에서 가장 염세적인 말들을 쏟아냈던 그녀는 이십 년 전 공장에서 만났던 노회찬 의원을 추억하며 꺼이꺼이 울고 또 울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청년들은 꿈을 위해 행복은 잠시 미뤄두고 감정 소비는 최소한으로 하라고 사회적으로 강요받는다. 하지만 추억을 회상하며 쏟아지던 그녀의 눈물은 내게 암묵적인 허락을 하는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울어도 된다고. 세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슬플 때 울어도 된다고. 세상과 함께 슬퍼하고 분노해도 된다고.  


헤어질 때 술에 취한 그녀를 안아주며 작게 말했다. “행복하세요, 피디님.”

“아니요, 우리는 절대 행복할 수 없어요,” 그녀는 말했다. Bitterly.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피디님, 저는 꼭 행복할 거예요. 불행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길어요.

 

노량진과 안동에서 만난 친구들은 공무원 시험을 붙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 속에 맴도는 저녁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지난 9일 내내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행복하세요.  




<이 글은 독립잡지 '월간 이리' 8월 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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