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물건, 공간, 그리고 사람들
디어클라우드의 '사라지지 말아요'를 듣다가 문득 지난 일 년 간 내 삶에서 자 반 타의 반으로 사라진 것/사람들을 세어보기로 했다. 순서는 중요도와 비례하지 않는다.
1. 싱가포르에서 가장 내가 좋아했던 카페 <타이니 로스터>
작년 말, 내가 살던 Clementi에서 스타벅스를 빼면 거의 유일했던 카페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이년 간, 매주 토요일 열 시쯤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고 맥북과 책 한 권을 들고 집 앞 맥도날드 건너편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두 정거장 후 내려서 sunset way라는 공공주택 단지 (HDB) 사이를 향해 걸어가면 동물병원과 베이커리 같은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데 그 가운데 위치한 <타이니 로스터>는 주말마다 지루함에 몸을 뒤틀던 내게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호주에서 배송된 신선한 원두를 추출해서 주먹만 한 얼음 (에스프레소와 물을 같이 얼린!)과 우유를 섞어서 예쁜 잔에 담아서 줬는데 조금 과장하자면 내가 지금까지 먹어 본 라떼 중 제일 맛있다.
내가 어느 정도로 이 카페를 좋아했냐면 -- 나의 모든 한국/ 홍콩 / 싱가포르/ 브루나이 / 중국 친구들과 ssum남들이 거쳐간 곳이고 심지어 카페 바리스타와 친구가 된 곳이다.
TMI를 하나 덧붙이자면 동갑인 바리스타와 친해졌는데 어느 날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무더운 (싱가포르는 365일 무덥다...) 한 여름 저녁, 퇴근 후 크리스탈 제이드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카페 밖에서 처음 만나는 상황이라 긴장한 나는 일부러 내게 익숙한 창가 옆 두 번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주로 나는 회사에 대한 불평이나 그 주 내가 프로듀싱한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놨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요트 클럽을 간 이야기나 학교에서 듣고 있는 경제학 수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이미 일을 시작한 나와 군대를 다녀와서 (싱가포르도 의무복무를 한다) 아직 학교에 다니는 그의 온도차가 너무 컸나 보다. 주로 내가 떠들고 그는 내게 시선을 한 번도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떠들다가 턱관절이 뻐근해질 무렵, 옆 바에서 술을 마시자는 그를 뒤로한 채 도망치듯이 빠져나온 후 카페를 가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얼마 전 카페 페이스북에 폐점 공지가 올라왔을 때 무릎을 탁 쳤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자주 갈걸. 아직도 내 혀는 이곳에서 마시던 라떼를 너무나 그리워하고 있다.
2. 의무적인 관심
싱가포르에서 동갑인 친구와 데이트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구글에서 인턴을 했을 때 그는 싱가포르 인턴이었고 나는 홍콩 인턴이었는데 그 인연으로 싱가포르에서 만나서 몇 번 저녁을 먹다가 친해졌다. 유명한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그는 매우 똑똑해서 내가 금융 관련된 프로그램을 프로듀싱할 때 여러모로 영감과 지식을 주었다.
살짝 옆길로 세자면, 예전에 한 남사친에게 여자를 볼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당연히 얼굴이랑 몸매지." "말이 통해야 하지 않을까? 깊은 대화 그런 거?"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 대화는 교수님이랑 하면 되잖아."
컨설턴트남은 내게 가끔씩 자신의 엑셀 파일을 사진 찍어서 보내곤 했다. 밤 열두 시에 아직도 호텔 라운지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받은 그의 컴퓨터 모니터 사진이 한 여섯 개는 있다. 한 번은 본인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석탄을 사진 찍어 보냈다. 이번에 회사에서 석탄 프로젝트를 하는데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종류의 석탄이 있다니! 하면서 재잘거리는 그의 문자에 예의상 "wow"를 해주면서 예전에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런 대화는 너네 상사와 하면 안 될까...."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게 우리는 어떤 사이냐고 고백을 해왔고 내가 친구를 하자고 했더니 갑자기 돌변해서 한 번도 너를 여자로 느낀 적이 없다며 여러 가시돋친 말을 내뱉고 사라졌다. 거의 일 년 동안 연락이 없던 그가 얼마 전 갑자기 야심한 새벽에 연락을 해왔다. "지금 뭐해?" 예전 같았으면 예의 상 대답을 했을 텐데 막상 답을 하려고 하니 마지막 데이트 때 그가 했던 막말들이 생각났다.
군더더기 없는 직설적 메세지를 날렸다. "What do you want?" 바로 페이스북 메세지함에서 글을 쓰고 지울 때 생기는 챗 버블이 여러번 생기다 말다 반복을 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 그는 "그냥"이라는 말을 남긴 채 영원히 사라졌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과 존중을 줄 필요는 없다.
3. 칵테일
홍콩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그곳은 소주와 맥주보다 칵테일과 진엔 토닉이 더 흔하다. 금융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퇴근 후 한잔하기 좋게 최적화된 곳에서 나는 첫 술을 피냐 콜라다로 배웠다 (happy hour때 마시면 싸다). 그래서 예전부터 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잘 이해 못했는데 지난 일년간 여러 방면으로 인생의 쓴맛을 느껴보니 쓰디쓴 위스키에 푹 빠지게 되었다. 원래 칵테일 바를 찾아다니던 내가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은 위스키를 싸게 마실까 머리를 굴리는 사람으로 변했다. 얼마 전, 홍콩에서 위스키 happy hour을 하는 곳을 찾았는데 이곳에서는 괜찮은 위스키를 한잔에 60~90 HKD (8500~ 12000원)에 마실 수 있다.
나만 알고 싶지만... 공공이익을 위해... 이름은 Whiskey & Words. 셩완에 새로 생긴 speakeasy bar.
4. 겁
겁이 많은 편이다. 나는 겁이 많아서 "no"라고 한 것들이 참 많다. 예를 들어 서핑이라던지, 웨이크 보딩, 소개팅, 스타트업을 이끌어달라는 제안 등등. 겁 (fear)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경계심, 내재되어 있는 자존감과 자신감 부족 등의 교집합인데 저 사이의 경계는 상당히 희미해서 어디서부터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인지 어디서부터가 내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며칠 전에는 입사시험을 봤다. 채권을 주로 다루는 영문 매체인데 글 잘쓰는 지국장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덥석 지원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나는 피디/기자 경력 삼년 동안 최대한 채권이란 주제를 멀리했다. 테크, AI, 금융, 경제, 주식, 오일, 금 등 여러 주제를 다뤄봤지만 채권은 막연히 너무 어려워 보여서 항상 동료 피디에게 넘기거나 핑계를 대면서 다른 주제를 다뤘다.
나는 은근 완벽주의자라서 내가 잘 못할 것 같으면 시작도 안 하는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입사 시험 한 시간 전까지 침대에 누워있다가 이러다가는 망하겠다는 생각에 남은 시간동안 숨도 안 쉰 채 채권에 대한 모든 것을 찾아서 읽고 네시간 동안 입사 시험을 치렀다.
결론은. 물론 더 준비를 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시험을 치르면서 내가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헤지펀드 매니저, 변호사, 투자자 등 업계에 관련된 사람을 인터뷰하고 기사를 쓰는 시험이었는데 실전을 통해서 배우니 확실히 내가 아는 점과 보완할 점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시험은 잘 못본 것 같지만 그래도 다행인 점은, 채권이란 주제에 대한 나의 몇년 동안 묵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제일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5. 멜론 계정
멜론을 육 년 넘게 썼는데 랜덤 음악 추천을 호기심에 이주 동안 쓴 Spotify보다 못해서 열 받아서 아예 취소했다 (나름 VVIP 멤버였는데...) 맨날 '언니네 이발관,' '9와 숫자들' 아니면 'Kings of convenience'를 듣는 내게 '트와이스' 아니면 'WannaOne'을 추천하니 매달 나가는 만원 남짓한 멜론 구독료가 너무 아까웠다.
멜론을 취소하고 Spotify를 깔려고 하니 한국에서는 결제가 안되서 영국 페이팔 계정까지 만들었다. 현재 프리미엄 계정으로 열심히 쓰고 있다. 아쉬운 것은, 내가 자주 듣는 한국 인디 노래가 많이 없다. 그래도 Spotify의 추천 알고리듬을 따라갈만한 앱이 없다. 예를 들어 앱을 딱 키자마자 1) Recently played (최근 재생), 2) Your heavy rotation (요즘 자주 들은 노래), 3) More like (가수/밴드 이름) -- 자주 듣는 뮤지션과 비슷한 가수/밴드, 4) Made for you (알고리듬을 사용해서 선별된 나를 위한 노래), 5) Recommended for today (오늘 추천 음악) 등 여러 가지 메뉴가 있어서 질릴 틈이 없고 항상 새로운 음악을 찾을 수 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많은 물건, 습관, 그리고 사람들이 사라졌다. 썰물과 밑물이 공존하듯이 새로 온 인연과 물건, 그리고 새로 생긴 습관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공간과 인연들이 더 많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