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won Sep 01. 2019

8월 마지막 날, 구름 관찰기

남산타워와 구름 전문가

어렸을 때 나는 꿈이 두 개 있었다. 첫 번째는 등대지기, 두 번째는 구름을 공부하는 사람.


그냥 막연히 하늘을 보면서 궁금했다. 왜 어떤 구름은 핑크색인지. 구름 위에서 사람이 과연 설 수 있는지 등등.


어쨌든 아직도 구름을 공부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어떤 명칭으로 불리는지 모르는 걸 보면 나는 두 번째 꿈을 그리 진지하게 좇은 것 같지는 않다.


6:37 pm, August 31st, 2019


과학적인 호기심도 약간 있었지만 그냥 구름의 먹먹한 남색이 좋았던 것 같다. 항상 우울감을 베이스로 깔고 있는 내 기분을 반영하는 색 같은 남색은 - 너무 튀지도 않고 검은색 같이 (우울증 같이) 빠져나 올 수 없는 블랙홀 같은 느낌을 주지 않아서 - 보고 있으면 편안하다.




보통 어디에서나 ('보통'이라고 적었지만 내가 살았던 곳들의) 해는 대략 오후 일곱 시쯤, 사람들과 함께 퇴근을 한다.


팔월 마지막 날, 해가 비대해진 몸으로 산 뒤 너머로 내려앉을 즈음인 오후 여섯 시 반, 하늘에 우두커니 떠 있는 구름을 보면서 다시 궁금해졌다. 어둠이 오면 구름은 어떻게 사라지는지. 사라질 때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약 한 시간 동안 해가 지는 모습을 관찰하기로 했다.


6:49 pm, August 31st, 2019


엄마가 부동산 아줌마의 보챔에 혹 하셔서 실수로 계약한, 현재 살고 있는, 군자에 위치한 빌라에는 옥상이 있다.


어렸을 때 <옥탑방 고양이>란 드라마를 보고 옥탑방에 사는 게 로망이었는데 머리가 커지면서 옥탑방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그 로망은 증발했다. 지금은 빌라 오층에 살고 있는데 집과 이어진 옥상에 올라와서 이렇게 구름을 구경할 수 있으니 어쨌든 나의 옥탑방 로망은 이루어진 샘이다.


6:52 pm, August 31st, 2019


꽤 현실적인 성격이어서 남들처럼 ‘버켓 리스트’를 품에 안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고 나름 생긴 '로망'이 하나 있다면 남산타워가 잘 보이는 곳에서 사는 것이다.


나름 ‘로망’이 하나 있다면 남산타워가 잘 보이는 곳에서 사는 것이다.

보통 로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왜”라고 물어보면 명확하고 이해 가능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내게 왜라고 물어보면 수준 있는 답변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래도 과거에서 실마리를 찾자면.


내게 여름방학은 항상 무료한 시간이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잠깐 들어와 학원 뺑뺑이를 돌던, 해가 유난히 길던 여름, 나는 밥 먹듯 지하철 이호선을 타고 강북에서 강남을 오고 갔다.


한강을 오갈 때 몇 초동안 스쳐 지나가던, 넘실거리던 물결과 건물 사이에서 우뚝 뾰족한 연필심 같이 하늘을 찌르던 남산 타워에서 나는 이유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그 짧은 찰나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나는 사람들의 지문이 묻은 이호선 창문에 이마를 누르다시피 대면서 지하철 밖의 공기와 자유를 갈망했다.


며칠 전,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그래서 대학생이 됐을 때 짧은 가을방학임에도 꼭 반나절 시간을 내서 남산을 걸어 올라갔다. 빨갛게 물든 단풍 (아니면 코를 찌르는 은행나무 열매의 냄새)에 취해 홀로 남산을 걸어 올라가는 과정은 내가 집, 즉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게 해 줬고 그 과정을 거치며 매번 심적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여정 후 정상에 도착하면, 서울을 가득 채운 빽빽한 빌딩을 내려다보며, 숨 막히는 경쟁과 긴장의 도시 한참 위에 내가 서 있다는 몇 분의 해방감을 코로 깊게 가을바람과 들이마셨다  

몇 년 전, 남산의 가을


어쨌든. 지금 살고 있는 집 옥상에서는 남산타워가 가는다란 샤프처럼 보이긴 하니 뭐 그럭저럭 로망을 이룬 샘이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남산타워가 썩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먼 미래에는 타워가 좀 더 선명히 보이는 곳에서 살고 싶다.




7:02분, 구름의 남색이 더 짙어졌다. 구름 윗 자락형광색 용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7:02 pm, August 31st, 2019


7:15분, 글을 쓰다 보니 구름 덩어리가 오른쪽으로 이동을 했다. 구름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마 하루 종일 이렇게 눈으로 구름을 좇겠지? 하늘 색도 주황색에서 좀 더 연보라 색으로 변했다  


7:15 pm, August 31st, 2019


7시 18분쯤, 남색 구름이 점점 오른쪽으로 옮겨가면서 주홍색 노을이 진해지니 남산타워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좀 더 아름답게 색을 설명하고 싶지만 아마 정확한 색상은 팬톤 웹사이트를 참고하는 게 도움이 될듯하다.


7:18 pm, August 31st, 2019


큰 구름 덩어리는 잠깐 내가 한눈을 판 사이 다이어트를 했는지 현저히 몸이 작아졌다. 서서히 오른쪽으로 옮겨가는 구름을 보다가 생각난 책이 있다.


홍콩 갤러리 Tai Kwun에서 구름의 움직임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마사나오 아베 (Masanao Abe)라는 물리학자는 15 년동안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후지 산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촬영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마사나오 아베 (Masanao Abe)라는 물리학자는 15 년동안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후지 산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촬영했다.


한참 후, 도쿄에 있는 그의 집에 묵혀있던 기록을 구름을 공부하던 Helmut Völter 이 발견해서 출판을 했다. 책의 제목은 “The Movement of Clouds around Mount Fuji (후지 산 주변 구름의 움직임).”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구름을 공부하는 학문은 Nephology라고 한다. 오늘 한 시간 동안 구름을 관찰하고 얻은 약간의 마음의 평화와 눈의 즐거움에 혹해 몇 초동안 나도 구름학(?)에 뒤늦게 입문해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뼛속까지 도시녀 - 넘어질까 봐 무서울 정도로 빠른 홍콩 에스컬레이터를 좋아하고 수시로 알람을 쏴대는 뉴스앱에 중독된 - 그런 내가 구름 전문가가 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7:21분, 남색에서 짙은 회색으로 변하며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이 별 의미 없는 구름 관찰기를 마무리한다.


7:21 pm, August 31st, 2019





작가의 이전글 지난 일 년 동안 사라진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