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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따뜻 Dec 14. 2020

아이에게 신적인 존재, 엄마.

'엄마' 란 무엇일까?

요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자주 듣고 있다. 육아로 엉크러진 마음을 정돈하는 방법 중 하나로 하는 일이다. 내 일을 하며, 라디오 듣듯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켜놓고 듣는 중이다. 


법륜 스님의 즉설을 듣는 중에, 마음에 꽂히는 것이 있었다. 

# 엄마는 아이에게 신이 된 적이 있는 존재라는 것. 


집안이 무너져 절박하게 되면 정작 발벗고 나서서 어떻게든 생활을 이어가는 건 가장인 남자가 아니라 '엄마' 라고 했다. '여자' 가 아니고 '엄마'. 그건 아이를 낳고 키우며 신적인 존재가 되어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나의 아이에게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많은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완전히 거세되었던 수면욕, 식욕, 성욕들. 그것을 딛고 아이를 키워내야 했던 인내의 시간들. 입으로 먹고 뒤로 싸는 본능을 거슬러 뒤로 먹고 입으로 싸는, 본능을 거스른 엄청난 희생. 한 아이에게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수행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아이를 낳고 이런 수행의 시간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은, 왜 나만? 이라는 생각이었다. 분명 남편과 같이 부모가 되기를 선택했고, 같이 부모가 되었는데, 왜 나만? 나만 못 먹고, 나만 못 자고, 나만, 나만, 나만? 그런 생각들이 남편에게 불똥이 되어 떨어졌고, 남편이 잘 먹고, 잘 자기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런 감정들이 아이에게 번져 쓸모없는 화를 내고 나면 정말 나를 완전히 잠식할 것 같은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수행 실패였던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신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신이 아님을, 매일 같이 확인하고,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서 다시 일어나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던 그 시절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고통의 시간은 '엄마'가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특권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내가 우주의 질서이고, 신의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밀쳐내고 화를 내도 다시 내 품으로 파고 든다. 애비가 아무리 달콤한 것을 준다 한들, '누가 제일 좋아?' 하고 물으면 언제나 '엄마' 라고 대답한다. 내가 그 아이를 위해 욕구를 거스르고 본능을 뛰어 넘어, 편히 자는 대신 아이를 돌보고, 느긋하게 먹는 일 대신 아이를 먹였기 때문이다. '엄마' 가 가진 유일한 특권이었음을, 그 때는 몰랐기에, 그토록 고통스러웠나보다. 


이제는 수행의 터널을 조금씩 지나 나는 아이들에게 '신'의 존재에서 '인간'의 존재로 돌아오고 있다. 아이들이 조금 컸기에, 편히 앉아서 먹을 수 있고, 잠도 쪼개서 잘 필요가 없어졌다. 아이들도 이제는 '누가 제일 좋아?' 라고 물으면 때때로 '아빠' 라고 답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서 한 발자국씩 떨어져서 사랑을 주어야 할 때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조금씩 작아지는 일이다. 


스스로 먹고, 자고, 싸게 될 때까지 아이에게 엄마의 존재는, '신'의 존재다. 그렇기에 엄마의 감정의 흐름이나, 엄마의 생각들, 가치관, 모두 아이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아이는 그대로 흡수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어떤 아이는 그때의 불행한 엄마의 감정을 평생을 안고 살기도 한다. 법륜 스님은 그런 뜻으로 36개월까지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좋다, 라고 말하시는 듯 하다. 

돌이켜, 아이들의 36개월까지의 나의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좋은 것보다 나쁜 감정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아 늘 미안하다. 엄마란 무엇인지, 스스로 공부해본 일 없이 그냥 막연하게 엄마가 되었기 때문에 당황하고,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또 당황하고, 또 부딪히고, 또 넘어지는 일의 연속이었다. 엄마가 되는 일이 이론적인 공부가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어떠한 역할인지, 어떠한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엄마가 되면 다들 나같은 오류는 덜 범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글을 남기는 오늘도, 아마도, 나는 또 당황하고 부딪히고 넘어질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다시 일어나는 힘과, 조금씩 수정해나가는 기술을 익히고,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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