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밥으로 대변되는 결혼제도의 갑을관계
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스물여덟 살 정도에 결혼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적당한 나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물론 결혼한 지 15년쯤 지난 지금 느끼기엔 참 쓸데없는 스스로의 기준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내가 원하던 나이에, 단 하루라도 안 보면 안 될 것 같은 남자와 2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결혼에 대한 나만의 착각
생각해보면 결혼 당시에는 이후에 펼쳐질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한 집에서 살게 된다는 생각만으로 마냥 행복해했던 것 같다. 남편은 자상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고, 가부장적인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 일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적극 지지해주고, 함께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봄날만 계속될 거라는 착각으로 덜컥 결혼제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마치고 회사에 첫 출근을 하는 날 아침이었다.
ooo 씨, 남편 아침밥은 차려줬어?
회사 선배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인사 차 한 말이었지만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는 엄마가 차려주는 아침밥도 바쁘다며 안 먹고 회사에 출근하곤 했던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입장이 달라졌다. 남편에게 아침밥을 차려줘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마디로 게으르고 나쁜 아내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아침밥을 아내에게 차려주는 남자들도 많을 것이다. 요즘처럼 '요섹남'이 많은 시대라지만 그것은 '특별한' 남편인 것이고, 그 아내들이 복받은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어진다. 이에 반해 남편과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워킹맘에게 '일상적'인 것이고, 이 일상을 실천하지 않는 아내의 남편은 '아침밥도 못 얻어먹고 다니는' 불쌍한 남편이 되는 것이다.
연애할 땐 '갑', 결혼하면 '을'
왠지 억울했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퇴근했다. 아니 남편보다 더 늦게까지 일하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세상은 ‘결혼한 여자’가 출근하기 전 남편의 ‘아침밥’을 차려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남편을 만나서 오늘 첫 출근이 어땠는지를 물었다. 나는 회사에서 아침에 겪었던 일을 진지하게 얘기해줬다.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와이프가 아침밥은 차려줬냐고 물어보시더라
뭔가 이때의 느낌은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대접받아야 하는 위치와 대접해야 하는 위치의 갭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어쩌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 처음 들어온 그 말에 결혼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왜냐하면 작은 부분이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남편이라는 사람과의 결혼을 후회했다기보다 사회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의 불합리성을 체감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아, 나는 결혼제도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일까?'라는 고민을 시작했던 시기였다. 남편은 이러한 일로 와이프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누군가를 위해 밥을 차리는 일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물론 지금 나는 아침밥을 차리지 않는다. 남편이 차리기 때문이 아니라, 아침을 안먹는 우리 가족의 게으른 습관 때문이다. 만약 남편이 아침을 꼬박꼬박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침잠을 포기하고 수고로움을 분명 감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밥'은 결혼한 여자가 감내해야할 것들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차려야 하는 아침처럼 결혼은 끊임없는 의무와 역할을 나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