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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연 May 12. 2019

도련님? 지금이 조선시대인가요?

호칭으로 대변되는 결혼의 갑을관계


 ‘나는 분명 결혼을 했는데, 왜 무수리가 된 것 같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결혼 전까지는 ‘오빠 동생’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오빠 동생은 집에 있어? 오빠 동생은 여자친구 있어?"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결혼한 후 오빠 동생은 ‘도련님’이 됐다.
그 호칭이 얼마나 정감있고 좋은지에 대해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대화를 나누던 기억이 난다.  
“얘, 난 처음 시집왔을 때 ‘도련님’이 아니라 ‘뎨련님~’이라고 불렀어. 부산에서는 그렇게 발음하는데 난 참 좋더라. 너도 도련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있어서 좋지?”
 


처음 결혼 후 그 호칭에 어색해하는 나에게 시부모님은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자연스레 호칭은 그렇게 굳어졌다. 결혼 전 우리 집에서는 작은 아빠에게 엄마는 늘 ‘시아제’라고 표현하셨다. 즉 ‘처제’의 시가 버전인 것이다. 아내의 여동생이 처제이듯, 남편의 남동생을 시아제라고 부른 것이다.
작은 아빠가 우리 집에 오시면 엄마는 늘 전라도 사투리로

“시아제 왔는가~”라고 하셨다.

아들만 둘인 집의 장남과 결혼한 나는 ‘아가씨’는 없었지만, 부산 작은집에는 3명의 사촌아가씨들이 있었다. 처음 그 아가씨라고 부르라고 하시는 말씀에도 얼마나 어색하던지.
사실, 그 호칭들은 '어색'이라는 표현보다는 묘하게 내 처지가 바닥까지 간 듯한 이상한 감정을 만들어줬다. 남성 중심적인 호칭문화는 제4차 산업혁명과 AI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도 진화되지 않고 조선시대의 시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결혼과 동시에 마치 조선시대에 사는 듯한 호칭인 도련님과 아가씨들이 생겼다.
 
존칭의 의미를 가진 ‘시가’ 호칭들
관계만 나타내는 ‘처가’호칭들
 


‘시댁, 시아주버니, 서방님, 도련님, 아가씨’
하지만 대부분 존칭의 의미를 가진 시가 호칭들과는 달리 나의 본가의 호칭은 존칭의 의미는 없는 단순히 관계를 나타내는 말에 그쳤다.

‘처가, 장인, 장모, 처제, 처남,처형…


남편은 나보다 나이가 열두 살이나 많은 큰언니에게 ‘처형’이라고 부르고 8살이나 많은 오빠에게 ‘처남’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남편의 사촌여동생에게도 ‘아가씨’라고 불러야 했다.


만약 남편이 형이 있었다면 내가 ‘부형’ 혹은 ‘시형’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렇게 불렀다가는 시가 식구들이 ‘경을 칠 노릇’ 이라며 개념없는 며느리로 여길 수도 있겠다. ‘~님’자를 붙여 공손하게 ‘시아주버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자신의 집을 ‘본가’라고 부르고, 여자들은 자신의 집을 ‘친정’이라고 부른다.  
본가(本家)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분가하기 전의 본디의 집이라고 나온다. 친정(親庭)은 결혼한 여자의 부모형제들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 나온다. 여기에서도 상당히 차이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과거 결혼하면 시가에 가서 살던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에서 이러한 용어들이 나왔고, 차별이라기보다 하나의 문화로 뿌리깊게 자리해왔다. 하지만 요즘은 결혼하면 '분가'가 아닌 '독립'해서 사는 것이 당연한 시대다. 육아 등을 이유로 필요에 의해 부모와 합가하는 집들도 있지만,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인 것이다.


한편으론 내 딸아이의 ‘본가’는 내 입장에서는 시가라는 것인데, 정말 가부장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동안 나는 딸아이에게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한 적이 없었다. 혹시나 늘 가까이서 아이를 돌봐주시던 아빠가 서운해 하시지 않을까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아버지는 종종 딸아이의 호칭을 정정해주셨다.


"그분을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되고
 외~할아버지라고 불러야지. 그리고 난 친~할아버지고~"


도련님은 '부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얼마 전부터 ‘시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시가’라는 호칭으로 바꿨다. 나도 모르게 부르던 호칭들이 들여다볼수록 차별적인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지난 설날 즈음 이러한 차별적인 가족 호칭에 문제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부는 공론화 작업을 거쳐 가족호칭 대안을 내놓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호칭을 바꾸는 건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적어도 결혼 전이라면 새로 관계맺음할 대상들에게 적용할 수 있겠지만, 결혼해서 한참 부르고 있던 호칭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름처럼 굳어져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도련님에게 ‘부제, 부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실 쉽지 않을 것 같다. 원래 '도련님'은 결혼하고 나면 '서방님'으로 불러야 하지만, 내가 여전히 결혼한 도련님에게 서방님이라고 부르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차라리 외국에서처럼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게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불평등한 호칭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언젠간 바뀔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내 아이들 세대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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