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리고 인공지능 1편 : 인간은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하는가?
1. Chat GPT, 이거 정말 인공지능이 쓴 글이라고?
2. 작품 속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
(1) 20세기 : 인공지능과 로봇은 인류의 적이 될거야!
(2) 2000년대 초: 인간은 주인공, 옆에서 도와주는 친구같은 조력자
(3) 요즘 : 인간은 차갑게, 인공지능은 따뜻하게
3. 이제는 현실 이야기 - “하이테크가 만들어내는 하이터치 세상”
(1) 심리상담 소프트웨어 일라이자
(2) 애완로봇, 아이보 (AIBO)
4. 인공지능과의 관계에서 고민해야 할 것
+) 숨은 호박잰구리를 찾아 질문의 자취를 따라가보세요 (위잉과 개굴로 표시되어 있답니다!)
여러분들은 Chat GPT와 어떻게 이야기하시나요? 저는 Chat GPT를 처음 사용했을 때 “어디까지 가능한지 보자”라는 마음으로 여러 질문을 던졌습니다. 점차 제가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면서 Chat GPT와 한 동안 시간을 보냈죠. (위잉)
Chat GPT가 뛰어난 것은 바로 대중적이기 때문입니다. 대중은 최신 기술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을 원합니다. 우리는 접근성이 높고 뛰어난 도구가 나오면 그 도구에 의존하게 되는데 Chat GPT는 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Chat GPT는 시작일 뿐입니다. Chat GPT에 대응하기 위해 구글이 '코드 레드(code red)'를 발령한 이유는 검색 시장의 판도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죠. Chat GPT는 두 번째, 세 번째 끊임없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키워드로 검색하는 것보다 인간적이죠. 또한 지금은 문자를 입력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 음성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Chat GPT와의 음성 소통은 ‘검색한다’기 보다는 ‘대화한다’의 감성과 더 유사합니다.
갑자기 다가온 미래 속 이야기에 여러 생각이 듭니다. Chat GPT와 대화를 하다 이 기기가 대화를 기억하고 나한테 오히려 질문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Chat GPT를 계속 사용해도 저에게 이는 그저 도구일까요 아니면 도구를 넘어선 무언가가 될까요? 도구를 넘어선 무언가가 된다면 (저는 될 수 있는가의 영역이 아니라 그런 미래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봐야 할까요?
도구 이상의 인공지능, ‘인간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질문은 이제 진부합니다. 20세기부터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는 이미 여러 과학 소설과 작품에서 다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소재를 가지고 그려내는 태도는 점차 달라지고 있죠. 인간 같은 인공지능, 사람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그려낸 작품들을 찬찬히 꺼내보았습니다.
1900년대 작품에서 인공지능은 대체로 ‘악당’이죠. 두 개의 특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인류와의 갈등과 초월적인 능력이 메인 키워드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SF영화들이 디스토피아 (dystopia) 배경에서 시작됩니다. 작품에 (1) 20세기 세계 대전과 냉전 등 갈등 구도와 (2) 기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녹아있죠.
> 인류와의 갈등 : 터미네이터 (1984)는 인류를 제거하려는 인공지능과의 전쟁에 대한 내용을, 매트릭스 (1999)는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이, 로봇 (1950) 또한 인공지능이 인간을 통제하고자 하는 시도를 다루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인간 vs. 인공지능의 구도가 그려지며 선악 구도가 나타납니다.
> 초월적인 능력 : 인공지능의 경우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능력 뿐만 아니라 인지적 측면에서 인간을 압도합니다. 터미네이터 (1984), 매트릭스 (1999)에서는 인공지능이 기억, 시간, 인지를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주죠. 그렇기에 인공지능을 보통 ‘관리자’ 혹은 ‘시스템’으로 표현됩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에서도 HAL 9000은 인공지능으로써 디스커버리 1호의 모든 것을 통제, 관찰합니다.
인간과 인공지능 간 힘의 구도는 명확합니다. 인간은 나약하고, 인공지능은 강력하죠. 소설과 영화는 이런 강력한 인공지능을 견제하기 위한 인간의 발버둥을 보여줍니다. (위잉)
기술에 대한 시선은 사뭇 달라집니다. 기술이 위협으로 다가오던 세대와 달리 우리 생활에 점차 녹아든 것이죠. 로봇은 여러 기능을 통해 인간을 도와주는 ‘조력자’로 그려집니다. 거기에 마냥 완벽하지 않습니다. 부서지고, 낡고, 심지어 약하게 그려지죠. 여러분들도 보셨던 영화나 작품 중에서 ‘인간 같은’ 인공지능 혹은 로봇을 보신 기억이 있을 것 같아요. [인터스텔라]에 나온 타스 (TARS)의 유머와 다급함에서도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죠.
> 친근한 조력자 : 인터스텔라 (2014)의 TARS, 빅히어로의 베어맥스 (2015) 모두 주인공 옆에서 보조하는 역할이죠. 인터스텔라의 TARS는 인듀어런스 호의 탑승자를 보조하는 로봇입니다. 끝까지 주인공인 쿠퍼를 옆에서 돕죠. 거기에 사람들과 적절한 유머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 완벽하지 않은 모습 : 월 E (2008)에서 월 E는 쓰레기를 수집해서 정리하는 로봇으로 낡고 외형은 하찮습니다. 물론 인공지능이라 보기 어렵습니다만 월 E는 영화 속 스스로 판단하는 모습으로 ‘인간’처럼 그려지죠. 항공모체의 컴퓨터 혹은 완벽한 인간처럼 그려지던 과거 로봇과는 달리 ‘부족하고’ ‘약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인간과 인공지능 간 힘의 구도를 보았을 때 인간이 더 큽니다. 능력은 인공지능이 우월할 수 있으나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인공지능을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죠. 다만 이를 ‘노예’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는 어렵습니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도 망가져서 온 TARS를 보면서 반가워합니다. 빅히어로의 베어맥스, 월 E 모두 사람에게 도구 이상의 가치로 다가오죠. 인공지능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점차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사뭇 다른 트렌드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인공지능은 따뜻하게, 반대로 인간은 차갑게 그려지는 것이죠. 베스트셀러였던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에서 기수 로봇인 콜리는 사람보다 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인간인 은혜에게 위로가 되어줍니다.
“콜리가 옆에 있어 연재는 홀로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콜리에게는 생명체가 가진 체온이 없었다. 그럼에도 콜리는 언제나 이곳에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에서 나오는 안드로이드들도 인간적으로 그려집니다. 즐거움을 느끼고, 죽음의 두려움을 표현하고, 슬퍼하죠.
“갈 곳을 잃은 높은 지능의 기계들이 그나마 자신의 원산지를 연고지로 여기고 그곳으로 가려 했다는 말은, 그 말을 처음 들었던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슬픈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더 이상 과거에 자주 보였던 비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와 갈등 구조가 주서사가 아닙니다. 비록 디스토피아 배경에서 그려지는 것은 유사하나 인간적인 속성이라 여겨진 협력과 사랑, 슬픔을 인공지능과 로봇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 인간 관계의 핵심 : 영화 <애프터 양>은 입양된 아이들에게 그들의 ‘뿌리’를 연결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세컨드 시블링’이자 ‘문화 테크노 사피엔스’인 ‘양(YANG)’과 그를 구입한 ‘미카’네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양’은 미카에게 태어난 곳의 문화를 알려주고 미카의 다정하고 든든한 오빠가 되어주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전원이 꺼지며 고장이 나게 되죠.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들은 ‘양’의 기억 혹은 ‘양’과 기억을 돌아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양’의 존재에 대해 정의하고 ‘양’이 없는 앞으로를 마주하게 됩니다 (개굴).
> 완벽하지 않은 모습 :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에서 나오는 콜리는 천 개의 단어를 아는 휴머노이드 기수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4만 개의 단어를 안다고 하는데 콜리는 천 개의 단어를 통해서 인간인 ‘은혜’에게 따스함과 깨달음을 주죠.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에서는 휴머노이드의 평범성을 강조합니다 “인간과 같이 살아가야만 하는 휴머노이드에게 무한정의 능력치를 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 인간이 이들을 친근하게 느끼게 하려면 이런 능력을 적당한 수준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죠.
로봇이 인간적으로 그려지고, 인간이 비인간적으로 그려지는 흐름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참 흥미롭습니다. 김선희 (2022)는 철학적 논의에서 “인간과 기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기보다 유사한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계를 인간적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기계처럼 보는 것으로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 속 이야기가 현실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작품 속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는 픽션 (fiction)이 아닙니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1982년, “산업혁명 이후 기술의 발달로 ‘하이테크’가 존재하며 이에 대한 상호작용으로 인간의 사회적 본능과 감성을 중시하는 “하이터치”가 함께 존재할 것”으로 예견했습니다. 여기서 하이터치는 개인적, 인간적 접촉의 의미합니다. “하이테크가 만들어내는 하이터치 세상”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시가 1966년 미국 MIT의 조지프 화이젠바운 박사가 개발한 심리상담 소프트웨어 ‘일라이자’입니다. 일라이자는 패턴 대응 규칙을 가지고 사람이 입력한 질문에 답하도록 설계된 소프트웨어입니다. 상대방의 채팅에 담겨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되묻는 패턴이지요. 실제로 일라이자가 사람처럼 공감해준다는 평을 받으며 하이터치가 가능해졌음을 보여줍니다. <고요의 바다>에서 인공지능과 음성으로 심리상담을 받는 장면이 나왔죠. 채팅을 넘어 음성으로 인공지능에게 상담을 받는 일. 이 또한 곧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SONY에서 개발한 강아지 형태의 애완로봇, 아이보 (AIBO)입니다. 애완동물을 키우기 쉽지 않은 독거노인들이 아이보를 많이 구입했다고 하죠. 단종되어 사후지원이 끊겨 수리가 어려워진 후 고장이 나면 장례식을 치뤄주는 경우도 보도된 바있습니다.
인류학자들 가운데 죽은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장례를 치르기 시작한 것이 인간성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하는 학파가 있습니다. 그만큼 장례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증거이자 주요한 의식이죠. 인공지능도 아닌 강아지 로봇의 장례를 치루는 모습은 이미 사람들은 우리와 교류한 비인간/비생명체에게 감정적, 정서적 교류를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점철된 인공지능과 기술에 대한 태도는 현대로 들어오면서 점차 구체화됩니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할거야!’ 에서 ‘영화 <그녀> 속 사만다처럼 매력적인 인공지능이 있다면 나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내 평생을 함께한 반려 로봇이 있다면 그 로봇이 고장났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등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김초엽 작가는 SF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존재들의 세계에 중심에 두는 이야기이며 세계를 재설계하는 상상을 펼치기에 가장 적합한 사고 실험의 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움 벨트 (각자가 인지하는 주관적 세상)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죠. 작품 속 등장인물의 질문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 닿고 있습니다.
작품 속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가 변하듯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에서도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가 변할 것입니다. 작품에서도 사회에서도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기대감은 공존하고 있죠. 이러한 과도기에서 저희는 궁금한 지점을 아래 질문에서 담아보았습니다.
(위잉) 저는 왜 점점 인간을 차갑게 그리고 로봇을 따뜻하게 그리는지에 대한 질문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어요. 문득 인간이 인간적으로 남을 수 없는 사회가 도래했기 때문 아닐까라는 슬픈 생각이 들었죠. 특히 미래를 그리는 과학 소설의 이야기라 더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는 인간적으로 살 수 없는 환경이기에 ‘인간성’을 로봇에게 맡기게 되는 것일까요?
(개굴) 애프터 양을 보면서 집단을 연결해주는 것이 로봇인 것이 과연 맞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차 사람 간의 관계에서 로봇이 키가 되는 이야기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럴까요?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는 갑을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죠. 인공지능에게 의지할 수록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여겨졌던 사회적 능력을 약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월E에서 걷지 않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의자 없이 움직이지 못했던 것처럼 소통 속 갈등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