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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LA Jul 17. 2022

‘나이브(Naive)’함에 대하여

세상 순진무구한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나이브함이란

  

직장인들의 우선순위 영단어와 부작용

  취업준비를 할 때, 고득점의 토익과 스피킹 능력을 빌드업하기 위해 단기간 엄청난 노력을 한다. 그런데 막상 회사를 다녀보면 외국계가 아닌 이상 한국어가 98.9%, 영어는 일부 소수 직군에 한해 쓰이는 언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때, 그동안 내가 쏟아부었던 영어 학원비, 스터디 모임, 시험 응시료 등의 기회비용이 fast-forward되어 내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며 현타를 느끼게 된다. '브로큰 잉글리시 & 콩글리시'를 입에 달고 사는 우리네 직장인들은 대충 5-6개로 추려지는 자주 쓰는 단어를 모국어처럼 섞어쓰며 마치 내가 대단한 전문용어를 쓰는 듯 남발하게 된다.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임에도 나머지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된다는 우스운 이야기)


  총 3개의 대기업을 다니니며 겪은 나의 경험을 예로 들자면, 가장 빈번하게 쓰는 단어를 기준으로 총 5개의 '우선순위 영단어'를 추릴 수 있고 직딩들의 언어로 풀이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태핑(tapping) 하다

     : 연락하다, 시도하다, 접근하다, 협의해 보겠다, 그렇게 되게 하고 있다 등등

  2) 얼라인(aligned)되다

     : 맥락이 맞게 하다, 내용이 일치하다, 같은 방향성이다, 너의 의견에 동의한다 등등

  3)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하다

     : 한 번 얘기해 보다, 미팅해 보다, 물어보다, 전달하다, 공지하다 등등

  4) 네고(negotiation 의 준말)하다

      : 협의하다, 내가/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얘기해 보다, 에누리하다, 흥정하다, 내가 이득이되게 하다등

  5) 그리고 대망의 나이브(naive)하다 이다.

      : 순진하다, 어리석다, 바보같다, 당했다, 어필이 안되다, 로직이 없다, 의견에 힘이 없다, 부족하다,

       바보같다, 쫄보같다, 재고해서 다시 가져와라, 이게 최선이냐 등등


  하나의 상황극을 예로 들어 보자면

[김부장] 오대리 내일까지 가지고 온다던 기획안 어떻게 돼가고 있어? 업체들 다 만나보고 뭐 좀 뽑아봤어?

[오대리] 아 네 부장님, 제가 지금 업체 두세개 정도 태핑하고 있고요, 저희 방향성이랑 얼라인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하고 있습니다.

[김부장] 계약금은 어떻게 됐어? 미리 준대 안준대? 네고 해봤어?

[오대리] 계약금액도 태핑은 하고 있는데, 선지급은 해줄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부장] 뭬야? 잘 모르겠다고? 오대리 지금 장난해? 사람이 왜이렇게 나이브 해? 그쪽에 주도권을 주게 되면 우리가 일하기 얼마나 어렵겠어? 상대가 우리를 봐줄거라는 건 정말 나이브한 생각이야.

  영어단어를 썼지만 너무나 한국어 같은 찰떡 조합이다. 하지만 다양한 세대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는 특정회사에서는 모두에게나 쉬운 일도 아니다. 내가 다녔던 첫 회사에는 촬영, 음악, 영상 등 Media 전문 부서가 있었는데 기술직이고 경륜이 높으신 분들이 많아 사실 문서보다는 전화가 빠르고 한자어가 더 익숙한 분들이었다. 어쩌다 저런 폼잡는 김부장같은 사람이 팀장이 되면서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언어를 쓰며 업무를 했는데, 한 번은 이런 이메일이 온 적이 있었다.


"익월 진행할 이벤트 관련 A업체와 태핑 완료. 무대 설치 등 스케줄은 당사 스케줄에 얼라인시킬 수 있으나 금액은 당사 예산초과될 것으로 우려됨. 하지만 금액 자체는 레고(lego)가능"


  구두로 쓰는 말들이라 소리나는 대로 쓰신 것 같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참조되어 있던 이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아 ~~님 레고가 뭐에요 레고 ㅋㅋㅋ레고 장난감?" 이라며 한번 크게 웃었던 에피소드가 있는데, 사실 그 분들에겐 뭐 네고 레고 에고 사실 참 부질없는 말들이었다. 그냥 '협의 가능' 이라고 쓰면 될 것을.


세월이 흘러 새삼 다시 되새겨보는 '나이브함'

  나도 이제는 익숙한 생활이지만, "나이브"라는 말은 사실 참 아리까리하면서 상황적으로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말 같다. 도대체 '나이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이브의 사전적정의는 "Naive_순진무구한, 천진난만한 스타일의, 순진해 빠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들어 온 나이브는 다소 부정적이거나 부족하거나, 아니면 바보같은 상황 등에서 많이 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실제로 긍정적인 상황이나 상대에게 칭찬으로 할 수 있던 상황에서도 나이브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아지고 회사도 두 번이나 옮기고 나니, 새삼 '나이브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이브하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은 미숙하고 조금은 순수(순진X)하며 조금은 성숙해질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일 수 있다. 요즘의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수 많은 고민들과 후회들을 돌이켜보면 그렇게 나이브할 수가 없다. 아쉽고, 잘했었고, 부족했고, 귀엽기도 하고, 몰랐었고 등의 순간들이 가득했다. 나열을 해 보자면,


  1) 회사 브랜드 밸류만 보고 비전은 보지 못한 채 이직했던 나는 참 나이브하다.

  2) 언제까지나 밤새 술도 마시고 클럽도 가면서 뽀레버영(foreveryoung)할 수 있다는 생각도 나이브하다.

  3) 현실은 30대 중반인데, 요즘엔 백세시대니까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이브한 생각이다.

  4) 한 잔만 더 마시고 가야지라고 생각했다가 결국은 택시비 25천원을 낸 나는 참 나이브하다.

  5) 예전에 남자친구 선물로 세일가에 쿠폰까지 먹여서 명품 티셔츠를 샀는데, 정가라고 비싼거라고 우겨댔던 것도 참 나이브하다.(검색해보면 다 나온다..)

  6) 매일 끓여먹던 라면에 셰프의 킥이라며 이상한 레시피를 추가하고도 맛있길 바라는 건 나이브한 것이다.

  7) 결혼한 친구들이 예전처럼 나랑 놀아주지 않아서 서운한 건 나이브한 감정이다.

  8)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라며 현실과 자아비판으로 시간을 보내는 건 참 나이브하다

  9) 송혜교가 37살에 4살 연하인 송중기랑 결혼했으니 나도 아직은 괜찮다는 것은 필요이상으로 나이브하다.

 10) 한참 손해보던 주식이 갑자기 상한가를 쳐서 겨우 본전인데, 팔지 않고 '이제부터 본격 상승구간이다.가쥬아'라고 소리친 나는 나이브 그 자체다. (현실은 다시 마이너스)


  

진정한 나이브 함이란

  이렇게 써 놓고 나니, 나의 나이브한 순간들은 피식거릴 수 있을 정도로 귀엽고 어떤 때는 '왜 그랬을까'하는 조금의 후회와 반성이 남기도 하면서 한 없이 긍정적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신승리 하는 것도 굉장히 나이브할 수 있음 주의)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한 없이 후회스러웠던 순간들과 사무치도록 서러웠던 전 여자/남자친구와의 이별, 아무생각없이 샀던 로또가 만원이 됐을 때, 내일은 오늘의 나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살고 있다. 이 모든 순간과 기억, 그리고 추억들은 그때는 몰랐으나 지나고 보니 나이브했고 당시 나이브했던 덕분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나이브 함'이란 우리 모두가 격는 매일의 추억이고 웃음이고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나이브하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정의하겠다. 너와 나와,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말이다.

(하지만 송혜교 사례는 아직도 진실로 믿고 싶은데, 정말 나이브한 걸까?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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