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저렇게 뒤돌아볼 새도 없이 오늘이 지났잔아.
얼마 전 종영한 '술꾼 도시 여자들'이라는 드라마를 감명깊게 보았다. 다소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고 익살스럽게 연출된 이미지도 없지 않았지만, 너무나 개성이 강한 각기 다른 세 명의 주인공이 '술' 하나로 대동 단결해서 하루하루 헤쳐나간다는 점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 매일의 루틴과 싱크로율이 매우 높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도 퇴근 후 잠들기 전에 하루를 복기하며 좋아하는 술(와인이나 위스키, 가끔 소주)을 한 잔씩 하는 버릇이 생겼다. '복기'한다는 것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면 정말 그저 그런 일도 있었다. 술 한잔에 털어버리기도 하고 그 감정에 아주 몰두하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오롯한 Moment를 갖는 셈이다. '왜' 마시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냥 오늘 하루 잘 버텼다는 '참 잘했어요' 도장과 같은 의식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꼴에 사회생활 좀 하고 돈 좀 벌었다고, 왁자지껄 소주나 마시던 꼬맹이가 이제는 내 기호에 맞는 비싸고 좋아 보이는 술 한병 사서 홀짝홀짝 마실 정도로 머리가 컸다는 것이다.
지난 금요일이었다. 야심차게 만들어진 신생 부서에 합류한지 8개월 만에 그룹 리더가 바뀌고 윗분들의 방향성과 맞지 않다는 구태연한 이유들로 공중분해 되었다. 수많은 카더라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룹 리더 바뀌고 3개월만에 공중분해라니!...심지어 첫 리더는 낌새를 안건지 개인사를 들이대며 다른 팀의 팀원으로 내뺐다. 화장실 들어갈때랑 나올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정말 그런건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방향과 다르고 퍼포먼스가 맘에 들지 않는다 치자, 그렇다면 지시받는 대로 따라왔던 팀원들의 지난 시간, 업적 그리고 커리어는 도대체 누가 보상해 주는거지? 후속 처리는 더 가관이었다. 위에서 "자, 이 팀 이제 빨리 해체시키고 각자 다른팀 알아서 보내"하고 지령이 내려왔기로서니, 다들 삼십대 중반의 어느정도 한 분야에 대한 커리어를 쌓아 온 인재들에 대한 고민 없이 당장 TO가 있고 개인의 역량과 무관한 부서들로 뿌려버렸다. 이건 거의 통보를 받은 셈.
어떤 팀원은 충격으로 그날로 연차를 써 버리기도 하고, 어떤 팀원은 몇 일 동안 소화가 안되어 잠도 설쳤다고 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총 9년차 커리어와 경력직 입사임에도 전혀 쌩뚱맞은 부서로의 발령을 받았다(물론, 나를 받아주신 새로운 팀장님께는 매우 감사드린다.) 네고의 여지 없이, 그리고 "이미 보고를 윗분들한테 까지 해 버렸으니 번복의 여지가 없다, 주말동안 맘 정리해서 잘 받아들여라"라는 의미였다. 괄호하고 (월급쟁이가 회사가 까라면 까야지 무슨 역량이고 커리어야?)라는 말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뭔가 억울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개인의 의지, 충분한 협의 없이 회사에서 빨리 본인들 Task Clearing해 버리는 듯한 모습에 나는 '인간 재고품, 소모품'이 되어버린 느낌도 들었다. 요즘같은 시대에 아직도 이런 7080년대 식인 조직문화라니... 여기저기서 '축하한다', '그래도 그정도면 잘 된거다, 다른 사람들 봐라' 등의 심심치 않은 위로의 메시지가 오갔다. 이제 나는 어떤 목표를 갖고 일을 해야되며, 내가 커리어는 이대로 무너지는 건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렇게 이상한 상황이 펼처지고 어지러운 말들이 오가며 기분이 더러운 날이었다. 어릴적 친구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불금을 보내고 집에 왔지만 찝찝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냉장고에 남은 술도 없고 터벅터벅 편의점에 가서 '네 캔에 만원' 맥주나 살까하다가, 3병에 9,900원 할인행사하는 하프보틀 와인 3병을 집었다. 하프보틀은 한잔 반 정도 나오는 용량인데(375ml) 한 병 먹으면 '마무리 혼술'로 딱이다. 밖에서 1차 했으니까 약한 로제로 한 병 오픈. 소주를 타야되나, 왜이렇게 술 맛이 안나던지, 그냥 모르겠다 '바틈 업(Bottom up)'하고 한병 더 오픈했다. 그래 뭔 반병이냐 오늘 같이 개빡치는 날은 각 1병 해야지. 결국 375ml 두 병 마셨으니 혼자 와인 한 병은 마신 셈이다.
TV에는 '나 혼자 산다' 의 김광규씨가 56년만에 송도에 내 집 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한창이다. 엄청 재밌고 웃긴 내용인데도 난 참 기분이 계속 더러웠다(김광규씨 이야기와는 무관). 1병을 비웠을 때 쯤엔 "아니 회사 미친거 아니야? 돌았나? 이딴식으로 발령을 내 버리면 내 커리어는 어쩔티비?" 하는 감정이 고조되어 무르익었고, 2병을 비워갈 때 쯤엔 "슈퍼 을인 일개 직원이 뭘 어쩌겠어? 쓸데없이 감정낭비하지 말고 다시 재정비나 하자. 다른 커리어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야”하는 자기 합리화로 감정의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순 없고, 계란으로 바위를 쳐봤자 아까운 계란만 낭비할 뿐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오늘의 감정 롤러코스터는 이걸로 끝내고, 더 스마트한 Next Plan을 계획하기로. 6,600원(3,300*2병)으로 한 편의 드라마를 쓰고나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이게 알콜이 주는 매직이고 나에게는 잠깐이라도 바를 수 있는 빨간약이다.
※ 갑자기 술이 땡기는데 비싼건 싫고, 그렇다고 소주는 더 싫은 직장인 여성들에게 추천! 빈속에 먹어도 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