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도 생선도 제철이 있다는데, 나의 제철은 언제일까
우연찮게 최불암 아저씨가 진행하는 '한국인의 밥상' 프로그램을 유튜브로 보게 되었다. 평소 맛집 탐방이나 먹방 컨텐츠를 가끔 멍 때릴 때 보곤 하는데, 한국인의 밥상과는 컨셉이나 질적이나 양적 측면에서 꽤나 Light한 방송이라 부담없이 킬킬거리며 보게 된다. 반대로 한국인의 밥상은, 글쎄 '사람이 좋다'와 '생생정보통’을 우수한 배합으로 섞어놓은 다큐멘터리 혹은 드라마 정도로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전국 각지의 로컬 식재료와 토속 음식을 매개체로 진짜 수수하고 소소한 우리네(사실 우리 부모님 세대: 베이비부머)의 삶과 애환을 최불암 아저씨의 구수하고 농익은 목소리로 그려내는 것. 사실 너무 슴슴한 내용이라 본방사수할 정도로 재미를 느끼기엔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프로그램이 벌써 12년째 이어오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어서 꽤나 놀라웠다.(2011.1 - 현재). 지난 12년 동안은 거들떠도 안보던 이 프로그램에 갑자기 흥미를 느끼게 된 걸 보니, 나도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나이가 많이 찬 건지 싶다. 아니면 취향도 관심 분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고 다 때가 있어 그런걸지도 모른다.
유튜브 썸네일 중 눈에 들어온 에피소드는 '숭어 밥상(14년 3월 방송분)'이다. 원체 생선을 좋아하기도 하고 태생이 인천인지라 항상 부모님댁에 가면 온갖 해산물 요리를 해주셔서 그런지 재미나게 시청했다.
숭어는 예로부터 거제 사람들의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주요 식재료로 식량이 귀했던 봄철 특히나 귀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이 허기질때 생각나는 생선이라고 한다. 숭어는 양식으로 길러지는 가숭어(밀치)와 자연산 숭어로 나뉘는데, 산란기 이후인 3-5월이 제철이고 특히 보리가 피는 시기(5-6월)에 잡히는 숭어를 '보리숭어'라고 한다. 회를 떠 보면 흰 살과 붉은 빛이 섞여 있는데 보통 모둠회를 먹어본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모두 먹어본 그 친구다. 우럭이나 광어보다 살수율도 좋고 가격도 저렴해서 가성비있는 생선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제철에 먹는 자연산 숭어는 그 비싸다는 감성돔보다 몇 배는 낫다고 하니 얕보지 말 것. 보통 수산시장으로 회를 뜨러 갈 때 국민회로 불리는 광어나 우럭보다 선택지에서 밀리는 어종이지만 저열량 고영양으로 자산어보나 동의보감에서 언급될 정도라고 한다.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회 먹자'고 하지 '숭어회 먹자'고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 맛이 달고 독이 없어 사람의 오장을 이롭게 한다 - 동의보감
거제사람들이 숭어로 만든 다양한 요리들을 (*숭어회, 숭어미역국, 숭어튀김, 숭어전 등등) 동네 사람들과 나눠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문득, 4월인 지금이 보리숭어 철인 것을 깨달았다. 이럴수가! 우연치고는 너무 소름끼치는 유튜브 알고리즘 덕에 오늘 저녁은 제철 숭어회에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달려간 수산시장에서 내가 자주 찾는 봉균수산 사장님한테 "사장님 보리숭어 있어요?"라고 물으니 "지금은 보리숭어가 제일 맛있죠~ 철이잖아요 어떻게 알고 오셨대" 하며 바로 큰 놈을 들어 냅다 머리를 치셨다. (손은 눈보다 빠른 우리 사장님T_T 재고의 여지없이 바로 내리침). 제철이라 그런지 크기도 크고 살도 많이 올라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우럭의 2배 크기였다. 하지만 그 가격은 너무나 착한 33천원! 만약 같은 크기 우럭을 사려면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두배 값이었다.
자연산이라 그런지 평소 생각했던 흙냄새도 전혀 없고(흙냄새는 양식 가숭어) 고소하면서 탱탱한 식감이 고급스럽기 그지 없었다. 여기에 국민 술 ‘처음처럼’으로 마리아주해서 먹으니 ‘한국인의 밥상 목동편 22년 버전’ 이라고 해도 무색할 만큼 맛이 좋았다. 보리숭어 한 점에 처음처럼 한 잔씩 적시며 최불암 아저씨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제철(in season)' 의 의미를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제철'이라 함은 사전적으로 '알맞은 때', '알맞은 시절'을 의미한다. 영어로도 'be in season'이라 하는데 풀어보자면 '그 계절의 기후, 환경, 상황(시장, 소비자, 트렌드 등)에 의해 최적화된 상태'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과일, 생선, 곡물처럼 우리가 먹는 육해공 식재료를 형용할때 많이 쓰는 것 같다. 제철 과일은 색감이 곱고 과육이 알차며 과즙과 향이 풍부하다. 제철 생선은 또 어떤가? 다른 철보다 살이 오동통 올라 덩치도 크고 살코기가 쫄깃하며 비늘과 껍질은 윤이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게되고 더 높은 가격에 팔려 그 계절만큼은 대체불가능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제철은 언제일까? 한 번 던져봄직한 질문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과 사회, 이렇게 작은 조직에서 큰 조직을 경험하게 되면서 다양한 환경과 사람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드라마로 인해 항상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개인은 어느샌가 평범한 'One of them'으로 변해간다. 특별하게 잘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이 모나거나 뒤쳐지지는 않은, 그러니까 다른사람으로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 말이다. 그러면서도 주변에 소위 '잘나가는 놈'을 보면 으레 '저 새끼는 어쩜 그렇게 운이 좋아?' 또는 '나도 저런 기회만 있으면 더 잘할 수 있어' 라는 일시적인 푸념으로 씁쓸하게 자신을 위로하곤 한다. 모두들 분명 한창이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고 그때는 누구보다 자신감과 매력이 넘쳤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한번으로 끝난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그 때가 지나갔다고 해서 더 이상 별볼일 없는 사람은 아니며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술자리 무용담으로만 간직할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과나 숭어나 얘네들도 갑자기 그냥 봄이 오고 여름이 와서 그 계절 인기템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름 내내 뜨거운 햇살과 폭우를 견디기도 하고, 바다 속 포식자들을 피해 거센 조류를 가로지르며 엄청난 운동량이 필요로 되기도 한다. 짧다면 짧은 각자의 제철을 위해 인내하고 견뎌내야만 하는 과정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철은 한철로 끝나지 않는다. '고가의 귀한몸' 대접을 받은 제철을 즐기고 나면, 다음 해 제철을 위해 또다시 그 인내와 고행이 반복되는 것이다.
사람도(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나만의 제철'이 분명히 있고 또 그것은 반복된다. 단지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인내하느냐에 따라 그 반복되는 주기가 다를 뿐이다. 충분히 그 찬란한 '나의 제철'을 즐기자. 그리고 그 이후 非시즌을 또 충분히 단련해 나가자. 1940년생의 최불암 아저씨가 여전히 또다른 밥상을 찾아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