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와 ‘향’이 생각나게 하는 것들
N년째 자취중인 나로서는 퇴근후 집에 오면 기계적으로 TV를 키게 된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그런지, 아니면 빈 공간에 혼자만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싫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적막한 공간의 사운드를 채워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채널 속 예능인들이다. 뭐 이정도면 또하나의 가족 Samsun** 수준인 셈.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할 땐 뉴스를 틀어놓고 대충 어제 무슨일이 있었나 흘려듣는다. 사실 오늘의 날씨만 들어도 되는데, 마치 나는 메트로폴리탄에 사는 커리어우먼인양 습관처럼 ‘만나면 좋은 친구’ 엠비씨의 목소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집 밖에서 여러사람들과 일과 그리고 활자들에 치이는 동안, 영혼이 반쯤 나간 박매니저는 본인의 할당량을 빨리 채우고 외롭지만 나만의 오롯한 그 곳으로 빨리 기어 들어가고 싶을 뿐이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나의 집엔 잠들지 않는 TV 프로그램들이 의미없이 목적없이 돌아간다. 백색소음에 대한 익숙함일까 아니면 고요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후천적 습관일까. 뭐가 되었던 나 역시도 ‘고요함’과는 꽤 오래 내외했던 것 같다.
이번 생일에는 유난히 고가의 향초 선물을 많이 받았다. 나 포함 모든 여자들이 좋아하지만 비싸서 내 돈으로는 일년에 한 번 살까 말까 한 ‘조말론’과 ‘딥디크’ 캔들을 무려 200g짜리 대용량으로 선물받았다. 나는 보통 이런 스몰럭셔리템은 아까워서 바로 쓰지 않고 인테리어용으로 잘 보이는 곳에 비치하는데 이번엔 왠지 바로 뜯어서 써보고 싶었다. 삼십대 중반에 뭐든 아끼면 똥되는 것.(옳소!)
이전에 향초를 태우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까워서 잠깐만 켰다가 끄고, 또 한 30분 태우다가 끄고 이런식으로 반복하다보니 주변 향초는 남고 가운데만 우물처럼 움푹 파인 형태가 되곤 했었다. 이번엔 반복하지 않으리라. 사용서를 정독해보니 처음 태울 때는 2-3시간이나 뭉근히 태워야 표면이 고르게 녹아 예쁘게 쓸 수 있다고 하더라. 뭔가 분위기도 내고 싶고, 하나에 10만원돈이나 하는 명품 향초에 대한 예우를 다하기 위해 오랜동안 내 밥동무, 말동무 였던 TV도 껐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향긋한 고요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아날로그적 감성에 빠지는걸까? 고운 표면위에 가녀리게 서 있는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 '타닥타닥'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간지럼피듯 서서히 일으키는 향긋한 첫 노트가 나를 사로잡았다. 조금 무거운 바질향이 미들노트로 그리고 드디어 무게감있게 퍼지는 라스트 노트 만다린향까지 이 오묘한 향들이 크레센도처럼 거실에 가득 퍼졌다. 향긋한 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퍼지면서 나른함이 몰려왔고 항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업무과제, 내일 보고해야할 것들 등등 메타버스급의 인풋(Input)에 가득찼던 내 머릿속이 올 포맷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외면하고자 했던 '몽환속의 시간'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자체가 나에게는 굉장히 낯선 경험이었다. 과연 내가 모든 소음으로부터 자유롭고 듣는 것이던, 먹는 것이던, 보는 것이던, 하나의 감각에만 오롯이 집중했던 적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난 아침에 일어나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앉아서 클래식을 들으며 명상을 하는 CEO들의 습관을 가질거야'라던지, '나도 이효리처럼 요가도 하고 채식도 하면서 모든걸 내려놓는 인싸 삶을 살아볼까'라는 등의 의도 충만한 인스턴트 경험 말고 우연히 발견한 감각의 만족(Serendipity) 말이다.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채널 돌리듯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별거 아닌 일인데 그날따라 감수성이 폭팔해서 기억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찰나의 집중이 내가 놓고 지냈던 것들과, 놓아져버리고 있던 나를 기억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딱히 잊고있던 사람에 대한 감사나 반성, 뭐 이런 거창한 생각이 드는건 아니었다. 첫날은 향이 너무 좋아서 계속 킁킁대면서 기분이 좋아진 나를 즐겼고, 두번째 날은 약간은 익숙한 향을 맡으며 스트레칭도 하고, 세번째 날은 일렁이는 불빛을 처다보면서 멍때리기도 하는 그런 '초기화되는(reset) 시간'을 오롯이 즐겼다. 갑자기 툭툭 생각나는 여고시절 에피소드나 내가 키우던 강아지 등 로직없이 내 머릿속을 헤집는 낯선 느낌과 생각들이 나쁘지 않았다.
꼭 향초를 태워야지만 가질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어쩌다 마주친 그 순간(Moment)으로 인해 이제 퇴근 후에 TV보다는 노라존스나 멜로디만 있는 재즈음악(청각)을 틀어 놓는다던가, 향초(후각)를 피운다던가, 와인 한잔을 굉장히 오랫동안 마신다던가(미각) 하는 시간들이 종종 생겨났다. 너와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불쌍한 닝겐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흡수하고 느끼고 분석해서 슈퍼파워급의 아웃풋을 창출해야만 하는 형벌을 받고 있기에 한가지 감각과 생각에 몰두해 본다는 것 자체가 사실 굉장히 비효율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사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이로 인해 진짜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생각을 해 보고, 또 킬킬거리기도 해 볼 수 있는 소중한 '리셋 리추얼'을 갖게 되었다. 명상이나 깨달음이 별 게 아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에서 얻은 깨달음도 사실 뭐 별거 아니었을 것이다. 내 리셋 리추얼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