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미디어에서 가볍게 소비되고 있지만 ‘죽음’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잘 알 수 없는 만큼, 참 무거운 주제다. 10살 때 난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눈이 아주 펑펑 내려서 온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새하얗던 날 엄마와 눈싸움을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언젠간 끝나겠지?’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그 어떤 감정과 상황이 모두 ‘끝’이라는 거니까.
죽음의 개념은 생각하면 할수록 무섭다.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우리가 푹 빠져 보는 드라마 주인공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도, 내일 있을 특별한 사람들과 모임들도 결국 아무 의미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종교가 없는 나에게 죽음은 의미도 감정도 결과도 없는 종결을 의미한다. 어린 나이에 난 정리된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직관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고, 엄마와 집으로 돌아와 한참 잠을 설치고 엄마에게 내 고민에 대해 물었다. 10살 아들이 죽음에 대해 물어볼 때 나는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이라는 전제는 참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끔 만든다. 마음이 급한 사람에게 천천히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줄 수도 있고, 한정된 시간 안에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도록 열정을 불어넣기도 한다. 난 주로 후자의 경우다. 난 잡스가 말한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든다. 영원에는 아름다움이 없다. 끝이 전제되어야만 대상은 비로소 아름다움이 생긴다. 삶이 영원하다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간 끝나고 불안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수 있다.
내 삶의 기쁨이 결국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되는 듯하다. 그냥 언젠간 끝날뿐이고, 그 시간에 아쉬움이 없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이 생에 아쉬움은 남기고 싶지 않다. 힘껏 일하고 힘껏 사랑하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다.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뿐인 듯하다. 그 대상이 어떻든 ‘사랑’은 나의 세계 안에서 영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한 명의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별이 생겨나고 스러져 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부모님 밑에서, 또 사람들 사이에 둘러 쌓인 듯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100%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마치 별과 별이 서로의 중력에 의해 도는 모습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원히 서로 닿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닿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랑을 하는 듯하다. 조금 더 가까워지고, 혼자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음, 죽음이 무서워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무서움이 내재되어서 일수도 있겠다.
나에겐 6살 된 강아지가 있다. 강아지를 키우며 생기는 유일한 단점은 강아지의 시간이 사람보다 빨리 흐른다는 점이다. 오늘, 정말 특별할 것 없던 어느 때와 같은 날, 어느 때와 같이 강아지와 산책을 하다가 문득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지 이런 생각을 한건 처음이었는데. 참 그렇다. 어린 시절 정말 보고 싶은 사람과 만나면 만나기 전부터 벌써 헤어지는 것이 아쉽고 같이 있는 시간에도 떠나는 것을 걱정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렇다. 애니가 지금 1살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나랑 5년은 더 같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오늘 너랑 있는 하루도 이렇게 좋은데 너랑 못 있을 그 5년이 너무 아쉽게 느껴진다.
큰 변수가 없다면, 나는 언젠가 사랑하는 이 아이를 통해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겠구나 싶다. 그날이 정말 오지 않기를 빌지만, 언젠간 올 테니까. (참 아쉽다.) 그렇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모두는 언젠간 죽는다. 내가 혼자 죽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힘껏 사랑할 필요가 있지만, 사랑하는 대상과 이 삶에 잠시 놓여 있을 때, 그 찰나에 그들을 힘껏 사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