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by 여행하는나무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송은경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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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서 직업적인 성취나 헌신이 얼마나 중요할까?

개인적인 감정이나 관계를 희생 내지 포기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여기 전문가적인 실존을 개인적인 실존보다 중시하며 살아온 한 남자가 있다. ‘위대한’ 집사를 꿈꾼 스티븐스가 그 주인공이다. 달링턴 홀(Darlington Hall)이라는 영국의 한 대저택의 집사로서 35년을 충실하게 봉직했다. 섬기는 주인이 미국인으로 바뀌고 뜻하지 않게 주어진 6일간의 여행을 하면서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켄턴을 만나기 위해 영국 서부로 떠난 여행길에서 그는 그동안 살아온 시간들을 다시 되짚어보면서 자신과 과거와, 깊이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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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철저한 자기 절제와 직업적 품위를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감정은 배제하고, 집사로서의 소임 완수를 무엇보다 우선시했다. 그에게는 ‘위대한 집사의 품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고 삶의 목표였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오직 주인에게 완벽하게 충성하고 봉사한 시간들은 스티븐스의 삶의 모든 것이었다.


‘나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 내 한 몸과 한평생을 바쳐 충성할 주인은 '진정으로' 저명한 가문 ‘위대한’ 신사여야 한다. 나는 ‘이지적으로' 부여된 충성심으로 신사를 뒷받침하고 그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자부한다.’


이렇게 마무리되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가 섬긴 달링턴은 분명 선량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으나, 시대를 잘못 읽었다. 새로운 유럽을 꿈꾸며 그가 헌신적으로 지원한 물밑 외교는 독일 나치 정권을 돕는 반시대적인 결과를 낳았다. 달링턴 경은 불명예와 수치에 괴로워하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그럼 스티븐스는 과연 ‘위대한 집사’라고 할 수 있을까?

맹목적으로 주인을 섬기는 그의 태도는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평생 추구했던 '위대한 집사'로서의 삶이 어떠했는지 말하며 구구절절 자신의 입장이나 선택이 정당했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독자 입장에서 그에게 수긍하기보다는 작중 화자인 ‘나’의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처럼 들리니...


스티븐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일중독자를 떠올리게 한다. 집사로서의 책무에 성의를 다하는 과정에서 놓쳤거나 외면했던 소중한 순간들을 돌아보는 모습을 보며 그의 뒤늦은 회한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서로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좋은 관계로 진전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켄턴과의 관계에서 그녀의 마음이나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는 모습이 짠하게 느껴졌다. 가장 존경했던 아버지의 노년과 임종의 순간에도 곁에 있어줄 시간도 내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 그에게 인간적인 감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위대한 그 무엇이 남았을까?

그가 ‘전환점’이라고 말한 선택의 기회들을 그냥 보내고, 자신의 직업적 '본분'에 충실하려 했던 선택들이 결과적으로는 사랑이나 개인적인 행복을 희생시킨 것이라는 쓸쓸한 깨달음만이 남지 않았을까?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당신에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일 다음에 일, 그리고 또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켄턴 양, 아니 벤 부인의 질문에 또다시 일을 놓지 못하는 스티븐스.


6일간의 여행길에서 자연이 주는 기쁨과 위로를 누리고,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기보다는 현재에 감사하며 살겠다는 켄턴 양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색다른 경험은 그의 인생관에 변화를 가져왔을까?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선창에서 만난 어느 노인과 대화하며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한보다는 남아 있는 나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런데, 여행 마지막 날, 인간적인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농담’의 기술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준비하겠다는 다짐을 보면 아직도 ‘위대한 집사’로서의 포부를 놓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충직한 마음으로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 어르신의 ‘농담’에 맞춰주고 있지 않을까? 일에 대한 헌신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그 단단한 신념이 씁쓸하다.


이 소설은 인간의 삶에서 직업적인 성취나 헌신이 개인적인 감정이나 관계를 희생 내지 포기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 생각해 보게 한다. 하루 중 가장 좋은, 저녁 같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스티븐스가 '남아 있는 나날'을 즐기면서 여유를 가지고 인간적인 희로애락을 표현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EB%82%A8%EC%95%842.jpg?type=w773 <남아 있는 나날> 영화 포스터

[남아 있는 나날]은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1989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작가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영국이 배경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여행 과정과 지나온 삶에 대한 회상 장면을 교차하면서 스티븐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하고 앤서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 주연으로 열연한 동명 영화를 감명깊게 보았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의 심리나 감정선을 잘 살리고 부가적인 묘사를 더해서 소설보다 더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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