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대신, 나는 낮은 꽃을 보러 갔다

광덕산 야생화를 찾아서

by 여행하는나무

모두가 벚꽃을 보러 나서는 계절이다. 나는 반대로, 시선을 낮추기로 했다.


4월 초에서 중순 사이, 도시는 왕벚꽃으로 환하다. 몽글몽글 피어난 꽃들이 회색의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사람들은 더 크고 더 화려한 벚나무를 찾아 움직인다.


나는 낮고 작은 꽃을 찾아 강원도 화천 광덕산으로 향했다. 이 산은 천상의 화원이자, 봄이면 야생화가 먼저 깨어나는 곳이다. 야생화가 많기로 소문난 천마산, 연인산, 함백산, 소백산 등은 긴 시간 산행하며 숲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야 하지만, 광덕산은 다르다. 조경철천문대로 오르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산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작은 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광덕산 숲 풍경


가장 적당한 시기, 가장 알맞은 자리에서만 만날 수 있는 꽃들. 야생화라 불리지만 모양도 색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 더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여린 풀줄기 위에 하얗거나 노란 꽃을 조용히 피워 올린 모습은, 마치 작은 생명들이 여는 비밀스러운 잔치 같다. 연초록 풀들과 자잘 자잘한 야생화와 우뚝우뚝 올라온 박새가 어우러져

숲 바닥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이 꽃 저 꽃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작은 존재들을 행여 밟을까 조심조심.

꽃 가까이 다가가려면 몸을 낮춰야 한다. 어느새 나는 무릎을 굽히고, 거의 엎드리듯 꽃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루귀, 복수초


2년 전 조금 이른 시기에 처음 왔을 때는 노란 복수초노루귀 가족을 많이 만났다. 지금 복수초는 몇 송이 보이지 않고, 하얀색 홀아비바람꽃, 꿩의바람꽃, 노루귀는 활짝 피어있다. 중의무릇, 양지꽃의 노란빛은 눈이 부시고, 동의나물도 이제 봉오리를 연다. 괭이눈, 큰괭이밥도 눈에 띄고 여러 색깔의 현호색도 자신만의 빛을 내고 있다. 파란색의 현호색은 오묘하다.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중의무릇, 현호색, 괭이눈, 큰괭이밥, 동의나물, 양지꽃


우리나라 고유의 자생종, 하얀 모데미풀은 개울가에서 한 송이만 겨우 만났다. 아쉬움이 스쳤지만, 그것마저 이 숲의 방식이리라 생각하니 더 귀하고 소중한 느낌이 들었다.


모데미풀


빙 둘러본 숲은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얼레지다.

광덕산이 얼레지가 이렇게나 많은 산이라니! 새로운 발견이다. 얼레지는 꽃잎을 뒤로 젖힌 뒤 암술과 수술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땅바닥에 큰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꽃은 활짝 피어나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작지만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태도에 압도된다. 초록잎을 펼치고 보랏빛 얼굴을 치켜든 모양새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어때, 나 멋지지?”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 첫사랑, 질투"이다.

어쩐지, 그녀의 자신감은 이유가 있다!!


얼레지


이런 야생화들을 제대로 만나려면 나를 완전히 낮춰야 한다. 나는 더 낮아졌다. 땅에 무릎을 대고, 거의 엎드린 자세로 꽃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카메라를 들고 렌즈를 통해 바라본 작은 꽃들은 놀라울 만큼 또렷하고 단단했다. 자신만만하고 고고한 자태를 보고 있으니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빛내는 친구가 생각난다. 다른 사람의 잣대에 맞추어 살려고 애쓰던 나의 지난 시간들도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작고 여린 모습으로 강하고 당당한 내면의 빛을 내뿜는 야생화를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놓인다. 우리 또한 대단한 성공이나 거창한 모습이 아니어도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 모습 이대로 충분하다고, 우리도 모두 자신만의 꽃을 피우고 있다고.


노루귀, 홀아비바람꽃


이른 봄에 잠시 피었다가 금세 사라지는 꽃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고 마는 존재들.

찬찬히 살펴보아야 찾을 수 있는 보물들,

고유의 모양이나 색깔이 어쩌면 이리 다채롭고 개성이 넘치는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숲 속 낮은 곳에 활짝 피어나 이 세상을 아름답게 빛내고 있다.

그러나 그 작은 꽃들도, 벚꽃처럼 완전한 형태로 이 계절을 채우고 있었다.

여름이 오면 기억조차 희미해질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이 숲의 낮은 자리에서 분명하게 피어 있었다.


박새, 현호색, 홀아비바람꽃


해마다 봄이 오면 나는 시선을 낮춘다.

그곳에, 작고 여리지만 흔들리지 않는 것, 나를 닮은 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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