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속성

창 1:1

by 부라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을 읽지만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시선으로 성경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기 위해 잠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보자.


태초에: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던 때

야훼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스스로 존재했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서

태어나 한계에 갇힌 시공간에서 인생이라는 삶을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동시에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시공간의 한계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태초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태초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더욱 어렵다.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


시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자는 무슨 의미인가?


1. 스스로 존재 가능:

사람과 다르게 사회를 이루어 부족한 면을 채우지 않아도

스스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으므로 결핍된 부분이 없다.

의식주도 필요 없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필요 없다.


2. 시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음:

사람은 한 시간대. 한 공간에만 머무를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나 시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는

여러 시간대, 여러 공간에 동시에 머무름이 가능하다.

합리주의에 기반한 이성은 하나의 시공간의 지배를 받는

인과관계에서 가능한 틀에서 움직인다.

그 결과 문제들을 해결하며 연결된

다른 문제들을 만들어내지만 야훼는 아니다.

본인의 뜻대로 시공간의 존재자들을 완벽한

인과관계로 움직이게 함이 가능하다.

(인피니티 스톤을 떠올리면 조금은 이해가 쉽다)


3. 인간의 이성으로 가능한(?) 가장 발전된 형태의 지성

'만들어진 신'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이성이 발전 가능한 가장 마지막 형태의

지성으로서의 신은 시간의 가장 마지막에 가능하다고 한다.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지성의 존재 형태로

스스로 불멸하는 존재자는 인간이 꿈꾸는

궁극의 지성의 결정체이다.

시공간에 갇힌 인간의 한계상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천지를


좁은 의미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과 땅을 의미하지만

태초라는 개념과 연결하면 시공간과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우주의 질서를 의미한다.

우주와 생명체들은 스스로 질서를 이루어

인간의 이해와 상관없이 생명을 유지시키고 호흡한다.


창조하시니라


시공간의 제한 없이 본인의 뜻 가운데

인과관계가 완벽한 시작과 끝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사람은 창조의 의미를 시작했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시공간에 갇혀있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원인을 알아내는 것도

버거운 사람의 이성으로 창조자의 끝을 위한

계획을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는 완벽히 창조의 처음과 끝을 알고

움직이기 때문에 타협이 없다.

사람의 이해와 융통성과 상관없이

오직 본인의 뜻대로 그의 나라의 질서로

움직이며 일한다.


야훼 하나님은 사람의 시선에는

고집불통이며 학살자이며

융통성은 전혀 없는 전쟁광으로 보일 수 있다.

그는 결코 당신의 뜻으로 움직일 수 없다.

인간의 시간으로 오래 걸려도 반드시 성취한다.


야훼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성경의 인물들의 부르심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이 부르심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내러티브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의 인물들을 부르신 방식과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그의 인물들을 부르신다.


2절부터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은 순종으로

그의 질서를 만드는데 동참한다.


창세기 1장 1절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대전제이다.

합리주의 이성의 끈을 놓으라는 의미가 아닌

이성을 발휘하여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닿을 수 없는

창조자의 속성을 성경은 가르친다.


그는 사람과 존재방식 자체가 다르다.

받아들여야 성경의 문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