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9
요약: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건널 수 없는 경계다.
하나님은 그의 속성상 감출 수 없기 때문에
에덴동산에 많은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낸
나무와 함께
그것을 모두 보여주실 수밖에 없었다.
인류사에서 선악과에 대한 논쟁은 격렬했다.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왜 거기에 두었는가?
몰랐다면 무능한 존재이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유치한 존재이다.
원죄가 신의 의도였는가?
에덴 밖에서 일구어 나갈 인류의 역사를
위한 포석이었는가?
인간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는
스피노자로 하여금
성경은 인간을 위해 인간이 쓴 저작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열매를 따는 행위를 선이냐 악이냐를 놓고
신의 도덕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의 수단으로써 인간의 무지를
드러낸다고 하는 전제를 통해
니체는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발표한다.
후에 이는 푸코에 의해서 계승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궁금하다.
도대체 왜? 선악과를 거기에 둔 것인가?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생명나무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2장9절)
1장과 2장의 창조의 과정을 살펴보며 피조물들은
창조자의 속성을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너지의 공급원 빛, 지구의 생명이 시작할 가능성을 만들어낸 우주와 태양계의 배열, 생명이 움트고 터전이 될 하늘과 땅의 구분,
생명체들의 정체성과 역할 구분해 운용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의 탄생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자신의 속성을 구분해서 담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각각 다르게 배분하여
그것들이 조화롭게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조화롭게 공동체 안에
풀어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심하게
권한과 책임을 피조물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부여하였다.
즉, 피조물은 유한하며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만을 담아낼 수 있다.
동방의 에덴동산은 이렇게 만들어진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이라고 하면 될 듯하다.
즉,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가득 찬 곳이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많은 나무들은
아름답고 소유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낸다.
너무나도 달콤한 포도와 사과를 맛보며
우린 그렇게 사람들에게 달콤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가?
또한 온유함과 겸손한 성품을 가진
부모가 되기 원하며
지적이며 사람들을 치료하며 격려하는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며 자신감 있게
비전으로 이끄는 리더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우리가 품는 비전과 꿈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생에 풀어놓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제한적이지만
나무들의 각각의 특징일 수도 있다.
그중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만의 속성이다.
즉,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건널 수 없는 분명한 경계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덴의 그 많은 나무 중에서
두 나무를 콕 집어 언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성경과 난해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히 열어서
보여주시는 존재이며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는 숨김이 없으며 자신의 모든 속성을
그의 피조물에게 가리지 않고 모두 열어놓고
보여준다.
인간이 창조된 순간 알몸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을 가림 없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은 그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있는 그대로의 창조자를 경험하며 만족하며
충족할 수 있는 장소다.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보여주며, 공유한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속성 중
일부만을 가지고 탄생되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피조물의 결핍을 채울 수 있다.
인간이 완벽한 기쁨과 만족과 고통이 없는 천국을 꿈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조자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곳이 유토피아이며 천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릴 수 없다.
그 피조물을 너무도 사랑하며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이유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그, 그녀를 만나고 싶기 때문 아닌가?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얻을 수는 있지만(3장 22절)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판별하는 눈을 갖지만
선악을 완벽하게 나눌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제한된 기준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제한된 눈으로 선악을 판별하게 된다.
인간에 따라 선악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선악이 여러 개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선악의 기준이 깨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하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여러 나무 중에서 특별히 언급하였다.
"이 두 가지는 너희들이 소유할 수 없는 나의 창조자임을 보여주는 경계이다.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탐할 수 있지만 나의 속성 때문에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너희와 나의 분명한 경계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생명을 운용하게 부름 받은 인간은 자신의 본분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기준으로만 현상을 판별하는 우를 범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은 각 진영의 최고로 인정받은
리더십이 품은 선을 구현하기 위한
이상의 충돌이 아니던가?
생명나무도 있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만 집중하는 우를 범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에덴동산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속성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난다.
왜 다 보여줄까?
극복할 수 없는 피조물과 창조물의 경계
이해한 것을 믿으려 하지 말고, 믿고 바라보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전제를 뒤집어야 가능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비전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부르심은 당신의 대전제를 뒤집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