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만나다-3. 노동

by 부라톤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동안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너는 들의 식물을 먹게 될 것이다. 너는 흙에서 취해졌으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 음식을 먹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저주로 들리는가?

아니다.


죄로 죽어야 할 인간에게 생명의 원동력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도구를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죄 때문에 가장 사랑하고 좋았던 인간과 헤어져야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하나님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만날 때까지 이렇게 버티며 살아남아라."


땅은 생명의 터전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인간은 생명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들이 뛰놀 수 있도록 운용하는 역할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설명은 창조사역의 과정에서 살펴보았다.


선악과를 먹고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부르심을 망각하고 창조자가 되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기로 결정한 순간, 경계선을 넘어선 순간,

운용의 터전인 땅은 인간과 함께 부르심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부르심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영혼은 깨어나 성숙해져야 하고, 그 성숙은 거룩의 묵묵한 발걸음을 통해서 가능함을 살펴보았다.


영성과 거룩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현실의 삶에서 회복하기 위한 영혼의 깨어남의 발걸음이라면

무엇이 이를 가능케 하는가?


"나는 부르심 받은 존재이며 그 목적에 맞게 소명을 가지고 사명이라는 목표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영성과 거룩이 펼쳐지는 곳은 땅이다.

땅은 인간과 함께 부르심의 소명을 감당하는

파트너이며 하나가 되어야 하는 존재다.

영성과 거룩으로 깨어난 인간이 발걸음을 내딛는 디딤은 땅밖에 없다.

땅을 디뎌야만 영성과 거룩의 발걸음이 가능하다.


부르심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땅은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인 황무지가 되었다.

부르심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인간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복과 폭력의 정복자가 되었다.


인간이 땅을 닫고 수고와 소산을 먹기 위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가시와 엉겅퀴들을 거둬내며 황무지에서 결과물을 얻는 이 과정이 노동이다. 참고 견디며 밭을 갈아야 한다.


못 참는 자들은 힘을 앞세워 정복을 시작했다.

폭력과 지배가 원형인 국가는 이렇게 등장했다.


노동은 인간이 부르심을 발견하는 시작과 과정이다.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방법이 노동이다.


노동 없이 그 누구도 인생의 가시와 엉겅퀴들을 거둬낼 수 없다. 가시와 엉겅퀴들을 거둬내야 갈 길이 비로소 보인다. 반드시 본인의 힘으로 해야 한다.

노동 없이 영혼의 성품을 성숙시킬 수 없으며 거룩의 묵묵한 발걸음은 불가능하다.


노동 없이 부를 축적한 인간은 타락한다.

환락을 찾고 쾌락의 도구들을 동원하지만

인생의 가시와 엉겅퀴들이 그들의 영혼을

깊게 할퀴어 상처를 더욱 심하게 할 뿐이다.


노동을 업신여기고 노동의 현장을 존중하지 않는

자본과 종교가 득세하는 나라와 시대는

영성과 거룩이 희미하고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종교가 판치는

어둠의 시대였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모든 생명은 노동한다.

한송이 코스모스만 하더라도

어두운 땅속에서 뿌리를 뻗고 계속해서 물을 길어 올리는 노동을 한다. 한 마리 참새인들 다르지 않다.

노동은 생명의 존재 형식이다."(신영복-담론)


정사와 권세는 노동을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노동하는 인간을 도구화시킨다.

노동자를 인간답지 않게 대하는 일이

성공의 상징인 듯 보이게 만든다.

본인도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포장한다.


돈의 유무로 인간성을 도구화시키는 방법과 더불어 노동에 대한 폄하하는 방법은 인간을 조종하고 거룩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전통적인 수법이다.


그들의 대변인들은 어떻게든 노동을 계급화시키고

노동의 방식에 따라 인간을 차별하는 보이지 않는 법과 보이는 법을 동원하여 인간성을 말살한다.

거룩한 무리들이 깨어나면 곤란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또한 이미 제정된 법과 질서를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일명 "빨갱이"라는

오명을 뒤집에 씌워서 동참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들은 노동의 회복이 영성과 거룩의 회복으로 가는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이라는 단어의 어감도 가까이하면 안 될 단어인 듯 조장한다.


말씀에 기초한 노동과 복지 개념을 잘 실천한

북유럽의 국가들은 이 개념을 치열한 구성원들의 용광로 같은 토론과 대타협을 통해 이끌어냈다.

그들에게 노동의 방법에 따른 차별은 없으며 직업에 상관없이 소명과 사명의식이 바탕되어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직업군끼리 만나서 결혼하고

돈의 유무로 결혼 관계를 맺는 일은 없다.


정치도 그들에게는 봉사하는 명예직이다.

우리처럼 엘리트들이 왕좌의 권세를 얻기 위해

생존을 넣고 벌이는 치열한 사투의 현장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건강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에 인생을 던지는 사람들은 정사와 권세의 희생양이 되어 저잦거리에 던져진다.


노동이 가치가 정당하게 평가되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정 장치가 만들어진다.

그 장치는 구성원의 삶을 매일의 필요뿐 아니라 가슴의 끓어오르는 도전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명을 담아낼 직업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에 직업이 곧 삶의 목적을 담아내는 도구가 된다. 노동은 영성과 거룩을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의 건강한 구조를 만들어 더 많은 구성원들이 영성과 거룩의 길로 인도한다.


노동은 사회주의자들의 단어가 아니다.

가장 가치 있게 다뤄져야 할 개념을 자본과 이념의 대립이 특정 이념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어 배척의 단어가 되고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영성을 나와는 상관없는 사이비 이단의 단어처럼,

거룩을 현실과 상관없는 성직자의 단어처럼,

노동을 특정 이념을 상징하는 배척의 단어로 만든다.


정사와 권세자들은 깨어날 소명의 발걸음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 없게, 잊게, 배척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에서 소개하는 믿음의 선배들

의 삶을 신학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적용하지만 결론은 부흥으로 끝난다.

그들에게 개개인의 부흥은 노동으로 소명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영혼의 성품이 성숙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흥이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을 갖고 노동에서 멀어지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노동자에서 벗어나 권좌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망의 도구로서의 부흥을 갈망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법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에 법꾸라지가 되고 나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기에 법 위에서 서부흥을 꿈꾼다.


부흥은 소명의 삶을 거룩한 무리들이 걸어가도록

불을 지피는 과정이지 결론이 아니다.

노동은 부흥의 과정에서 씨앗을 뿌리는 영성을

세우는 거룩의 길로 우리를 안내하고 세상 나라의 성공과 권력의 길과 맞서 싸울 맷집을 길러준다.

그들이 진정한 부흥의 주인공이 된다.


부흥이라는 단어보다 회복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이유는 잃어버린 단어들과 삶이 제자리를 찾아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여기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경험되기를 우리 모두 원하기 때문이다.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회복자로서 소명의 삶은

반드시 노동을 동반하여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고 보물을 찾는 삶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즐기던 작은 목동

다윗이 양을 치다가 부름 받는다.

그는 양치기라는 초라해 보이는 노동을

가족 대신 짊어진 어린아이였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의 변화를 꿈꾸던 사람이었을까?

아니다.

작은 한걸음 한걸음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며

국가의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왕이 되었다.

(사무엘하 8장)


지금 나라와 민족과 정의와 공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고된 노동의 길이다. 가족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동안 꿈꾸던 소명의 길을 실현하기 위해서 묵묵히 걸어가는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함께 횃불을 들고 많은 이들이 일어서고 있다. 이것이 부흥이요 회복의 길을 가기 위해 던지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이제 마음속에 담았던 꿈을 펼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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